Side Character/Text
ESCAPE HERE IF YOU CAN
2025. 3. 27. 14:58w. rino (@rino__kj)
📞×🦴
O스하지 않으면 못 나오는 방 소재입니다. 안합니다. (R-15정도)
캐릭터들의 설정이 많이 확정되지 않은 초반에 날조글로 요청드린 것으로, 현재 설정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소설 첫머리에 넣으면 시시하기 짝이 없을 생각을 하며 태연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라는 가벼운 의문이 자신의 친구였을 텐데.
눈을 떠보니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었다.
아니, 이건 아니죠. 모리스 핼러웨이는 지금 당장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다면 악마와 거래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일하는 박물관 스태프 중 진짜 악마와 동거하는 사람이 듣는다면 어디 가서 부정 타지 않게 그런 말 입 밖으로 내뱉지 말라며 드물게 언성을 높일 경거망동한 발상이었으나,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어났네?”
하필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이 벤 프리먼인 점까지 포함해서, 모리스는 이 상황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진작 정신이 들었는지 벤은 침대에 걸터앉아 모리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라거나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라니 생전 처음 보는 곳이네?’ 같은 말이라도 내뱉을 줄 알았는데, 그는 드물게 조용했다. 천하의 벤도 이런 상황에서는 당혹스러워 할 말을 잃기도 하는구나. 주변이 조용하니 절로 머리가 차분해졌다. 모리스가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참고로, 문은 안 열려. 내가 열어봤거든.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두들겨도 봤는데 꿈쩍도 안 하더라고.”
“……그렇군요.”
“내 말을 안 믿는다면 모리가 직접 시험해 봐도 돼.”
벤이 엄청 미덥지 않은 사람은 아니지만, 모리스가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굳게 닫힌 나무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았다. 어떤 구조로 잠근 건지 문은 조금 덜컹거릴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과 씨름하다 지친 모리스가 이 방이 만들어진 이유로 추정되는 섹스를 시도하기도 전에 바닥에 주저앉을 때까지. 등 뒤에서 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힘 다 빼도 되겠어? 와서 좀 앉아.”
눈을 뜬 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출근하여 3시간 근무한 것처럼 피곤해졌다. 모리스는 터덜터덜 걸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힘쓰는 일 많이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애썼네.”
웃음기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부터 모리스가 문을 여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티가 났다. 벤이 아무리 장난을 즐기는 성격이라도 남을 속이는 부류의 장난을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픈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이겠지. 모리스가 30초쯤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정돈하는 동안 벤은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정말 섹스하는 수밖에……없나?’
기어코 모리스도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섹스 단어만 봐도 벌벌 떠는 샌님도 아니고, 남자끼리 섹스하는 법도 미리 공부했다. 모리스는 자신이 제법 준비된 상태라고 자부했다. 아무리 상대가 벤이라 할지언정 이렇게 무드도 분위기도 없는 곳에서 첫 섹스를 하게 된 건 상당히 유감스러웠지만, 어느 문헌에서 말했던가. 세상은 인간의 의도대로 흘러가지지만은 않는다고.
‘그런데 왜 벤이 이렇게 조용하지?’
평소에는 온기가 필요하다느니, 손이 시리다느니, 품이 허전하다느니 별의별 기상천외한 이유를 대면서 모리스에게 달라붙거나 몸을 만지작거리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섹스하라고 등을 떠미는’ 이런 상황은 호화 만찬이나 다름없지 않나? 하지만 벤은 여전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문 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동정은 아닐 테고.’
아무리 모리스가 벤을 향한 안 좋은 감정을 끄집어내 그에 대해 안 좋게 평가하려 노력해도 그가 타인에게 인기 없는 삶을 살아왔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동정은 뗐겠지. 저도 모르게 벤을 평가하는 눈으로 훑어보고 말았는지, 시선을 느낀 벤이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엄청 열정적으로 쳐다보네.”
“아,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벤이 지금까지 동정은 절대 아닐 거라는 생각…을…….”
무심코 툭 내뱉고 나서야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고 깨달았다. 서서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와 함께 고개가 수그러졌다. 벤이 평소와 비슷한 얼굴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 건 그냥 물어봐도 화 안 낸다고. 당연히 모리가 처음은 아니지. 어느 쪽이든.”
“어느 쪽이든?!”
이번에는 벤이 입을 가로로 다물었다. 경험이 엄청 많지는 않지만 딱히 어느 쪽도 처음은 아니라는 뜻이었는데, 문란한 사람처럼 보였으려나. 만약 모리가 그렇게 경험이 많냐고 화를 낸다면 벤은 조금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모리 네 눈에도 내가 경험이 없어 보이지는 않을 것 아냐? 설마 이 나이 먹고도 네가 처음이길 바라지는 않겠지. 그건 좀 염치가 없는 바람인 것 같기도 했다. 눈앞의 모리스가 말을 고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할게요.”
역시 화가 났나? 언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분노하는 법을 배운 거지? 벤은 모리스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삽입 당하는 쪽은 굉장히 아프다는데 진짜 많이 아픈가요?”
“……어?”
“남이 말할 때 집중하지 않는 건가요?”
“아, 아니. 제대로 들었어. 삽입 당하는 쪽이 더 아프냐고 했잖아.”
“네. 제대로 들었네요.”
화가 난 게 아니라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애라고 놀리긴 했지만 뭐, 그렇게 애는 아니란 거구나. 애라서 이런 게 궁금했을 수도 있고. 벤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나름 고등교육까지 마치고 현재도 학문에 관련된 일을 하는, 타인이 질문을 던지면 성실하게 답을 내놓으려는 습관이 어느 정도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음…. 아무래도 아프지. 평소엔 다물려 있는 공간을 벌리고 들어오는 거니까. 그런데 아프지만은 않아. 넣기 전에 미리 풀어주면 사람은 알아서 적응하게 되어 있고, 몸이 쾌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거든.”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볼, 세운 것도 도로 식을 것 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모리스는 평소처럼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눈썹을 찡그리는 대신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벤의 대답을 곱씹었다.
“저랑 섹스한다면 어느 쪽이 좋다고 생각하시죠?”
“여기서 진짜 하려고?”
“안 하면 못 나간다는데, 그럼 평생 여기서 살 생각이었나요?”
“그렇게까진 생각 안 했는데, 모리가 이렇게 빠르게 상황을 수긍할 줄은 몰랐지. 우린 아직 한 번도 섹스한 적 없잖아. 그런데 대뜸 하라고 하면 순순히 하려나? 생각했는데 용감하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로 생각해서 공부도 했죠.”
“심지어 준비성도 철저하기까지.”
벤이 마른 손뼉을 쳤다. 나를 놀리냐고 하등 도움 안 되는 입씨름을 하는 대신 모리스는 다음으로 나아갔다. 아픈 건 싫다. 하지만 아픈 게 싫으니, 당신이 삽입 당하는 쪽을 하라고 하는 건 정말 ‘애 같은’ 말처럼 들려서 먼저 말 꺼내고 싶지 않았다. 벤이 그 말을 들으면 잠깐 크게 웃고 그러겠다고 할 것 같아서 더더욱. 모리스가 벤 쪽으로 아예 돌아앉았다.
“공평한 방법으로 결정하죠.”
“어떤 방법으로? 제비뽑기?”
“펜도 종이도 없어요.”
“그럼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낸 거야?”
모리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섹스에는 애무가 동반되어야 하니까, 서로 애무해 주다가 먼저 사정한 사람이 삽입 당하는 쪽을 하는 걸로 하죠.”
“……아?”
벤에겐 아주 드문, 여러 번 말문이 막히는 날이었다. 어느 청소년 관람 불가 컨텐츠에서나 적혀 있을 법한 말을 들은 탓이다. 대체 왜 이러지. 나 자는 사이에 약이라도 먹었나. 하지만 모리스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왜 이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설명했다.
“삽입 당하는 쪽은 아프다면서요.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쾌감을 잘 느끼는 쪽이 삽입 당하는 쪽을 해야 아픈 시간이 짧아질 것 아니에요.”
“…논리적이야….”
심지어, 반박할 구석도 별로 없었다. 불건전한 생각을 한 건 나뿐이고, 쟤는 과학적으로 이 상황을 해석한 건가? 벤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 더러워지는 건 싫으니까 벗고 하죠.”
“그래.”
벤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착실하게 셔츠 단추를 푸는 모리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라 그런지, 원래 모리스 핼러웨이가 귀여운 모습을 타고나서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웃긴 상황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황당한 대화를 주고받고도, 맨몸으로 체온을 나누고 서로 사랑을 담아 만지면 아래를 세울 수 있는 걸까?
인간의 몸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욕망덩어리라고 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