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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 剝製
2023. 5. 17. 21:29w. 바냐엘(@_Basilpesto)
첫만남 설정 기반의 글입니다.
⚠️ Warining: bodily harm, pseudo-religion, mass suicide, blood, indecent assault(kissing)
⚠️ 주의: 상해, 사이비, 집단 자살, 유혈, 동의없는 스킨십
# More _ First-meeting
사각사각…….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가 엇박자로 박제실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달칵하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먹빛 가위가 책상 위에 놓였다. 건조된 동물 사체 위로 몸을 숙이는 자비엘의 안경 속에 램프 불빛이 붉게 일렁였다. 자비엘은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어 곁에 있던 재떨이에 비벼 껐다. 혹여나 사체의 털에 불똥이라도 튀면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 작업할 동물은 어느 귀족 나리가 대륙 너머로 여행을 갔다가 현지에서 큰돈을 들여가며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표범이었다. 박물관에 희귀 동물의 표본을 기증하고 자신의 이름을 새긴 명패를 달아 나름 위신을 드높여보려는 졸부들의 흔한 수작이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표범의 사체를 보여주며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싼 동물이니 절대로 손상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관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귀동물의 사체 값이라고 해봤자 당신이 남들 모르게 뒤로 빼돌리는 액수보다 더 크진 않겠지. 자비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점과 지방을 깔끔히 떼어낸 가죽을 앞뒤로 꼼꼼히 살폈다.
오늘은 갑작스럽게 박물관 수장고의 전체적인 점검이 있어 오후에서야 보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높으신 분들의 변덕스러운 시찰 일정 변경 탓이었다. 일정이 틀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자비엘은 이 일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을 대로 받은 상태였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의 몸통만 한 넓이의 가죽을 들어 올려 곁에 있던 표범 모양의 마네킹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낑낑거리며 마네킹에 가죽을 뒤집어씌웠다. 본에 따라 이리저리 맞추고 나니 제법 생전의 것과 비슷한 위용을 뽐내는 맹수의 모양새가 되었다. 자비엘은 이음새를 따라 시침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무리해서 이 정도까지 진행해뒀으니 얼추 전시 일정에 맞춰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싸구려 수정으로 만들어진 표범의 눈이 어둠 속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순간 자비엘은 표범이 눈동자를 굴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조품일 뿐이었다. 죽은 것이 다시 생명을 얻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곳은 죽음을 전시하는 장소인 자연사박물관이기에. 한동안 표본을 바라보던 자비엘은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날이 갈수록 더 서늘해지고 있어 오랜만에 집에 들러 외투 몇 벌을 챙겨올 생각이었다.
작업실을 나서자 나른한 온기를 띤 오후의 햇살이 자비엘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원체 안개가 자주 끼는 동네였지만 오늘따라 날이 좋았다. 날씨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늦여름 저녁의 석양을 즐기며 귀가할 만한 날이었다. 그러나 자비엘은 그런 성정의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자가용에 몸을 구겨 넣었다. 어서 용건만 해결한 후 작업장으로 돌아가야지. 집 앞에 도착한 자비엘은 그렇게 다짐하며 차에서 내렸다.
정원에 우뚝 선 나무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너울거렸다. 늦여름의 짙푸른 녹음에 잠긴 집은 오늘따라 유독 고요했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자비엘은 잠시 문 앞에 서서 원래 자신의 가족들이 이렇게 조용한 사람들이었나 자문했다. 시간에 관계없이 항상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도 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왔었는데……. 오늘은 다 같이 어딘가 외출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항상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주했으니까. 이유를 물어봤자 피곤해질 뿐이다. 분명 그 이상한 종교 때문일 테니. 의문을 지운 자비엘은 피곤함에 절은 표정으로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저녁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복도에 장식되어 있던 장식품 위에 자리를 잡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거실로 향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너무나 익숙한 냄새가 자비엘의 후각을 덮쳤다. 눅진하고 비릿한 냄새. 피 냄새가 온 집안을 뒤덮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자비엘은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거실 바닥이 피로 온통 붉었다. 죽은 짐승들의 사체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사이사이 쓰러져 있었다. 조금 더 늦게 집에 들렀더라면 좋았을까. 그렇다면 어둠이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그의 눈앞에서 어느 정도 가려줬을 텐데. 서쪽으로 난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수사관의 손전등처럼 그들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파르테나, 루벤, 자이덴과 같이 한때 친숙한 이름을 가지고 있던 송장들은 생기가 빠져나가 이런 고급 저택보다는 자비엘의 직장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혹여나 숨이 붙어 있을까 들여다 본 차디찬 시체에는 맹수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흉측한 상처들이 남아있었다. 보석과 명화와 사치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공간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의 풍경이란 차라리 사회를 풍자하기 좋아하는 괴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믿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자비엘은 한참을 그 처참한 현장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때 어딘가에서 기척이 들렸다. 숨을 죽이고 있던 그의 귀에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구둣발 소리였다. 그것은 어머니의 침실에서 들려왔다. 분명히 이 풍경을 만든 장본인이리라. 자비엘은 짐을 그나마 멀쩡한 의자 위에 내려놓고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검을 조심스럽게 빼내 들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침실로 향했다. 침실에 가까워지자 콧노래가 들려왔다. 침실에는 어머니가 아끼던 화려한 옷가지며 보석이며 귀한 소장품들이 가득했다. 값비싼 장물을 챙기게 되어 제법 즐거운가 보군. 자비엘은 검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문가에 바싹 붙어 침실 안을 곁눈으로 살폈다. 범인은 어머니의 퍼 코트를 뒤집어쓴 채 시체를 쪼는 까마귀처럼 화장대를 즐겁게 뒤지고 있었다. 제압하려면 그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금이었다. 자비엘은 침실로 달려 들어가 검을 내질렀다. 동시에 범인이 그를 향해 뒤를 돌았다.
자비엘의 검은 아쉽게도 목표를 비껴 나갔다.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잘린 머리카락 몇 올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자비엘은 여전히 견제하는 자세로 상대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적당히 챙기고 도망칠걸. 한편 시트리는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소환된 데다가 제법 재미있고 예쁜 물건들을 많이 쟁여둔 인간들이라서 한참을 색색의 반짝이들을 넋놓고 구경하고 있다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시트리는 두 손을 든 채 자비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자비엘은 한껏 경계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공격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협박은 시트리에게는 앙탈에 불과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트리가 그에게 다가오자 자비엘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검 끝이 시트리의 눈가를 찢고 지나갔다. 검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데도 시트리는 동요하지 않았다. 악질이다. 그런 시트리를 보며 자비엘은 생각했다.
"이 강도 자식……."
그의 말에 시트리의 눈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뒤이어 입술이 찢어지며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강도라……후후…♡ 정말이지 평범한 인간다운 생각인걸♡"
시트리의 시선이 자비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자비엘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시트리의 눈빛은 기이했다. 마치 생기가 깃든 박제의 눈동자 같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박제된 맹수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주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마주한 사람처럼 자비엘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딪혔다. 팔에 단단히 힘을 준 채 시트리를 향해 칼을 겨누는 자비엘의 모습은 천적을 마주한 수사슴이 곧고 단단하게 뻗은 뿔로 상대방을 들이받기 위해 자세를 취한 것처럼 보였다.
"억울한 건 오히려 이쪽이란 말이지♡ 애타는 목소리로 불러준 건 좋은데, 이렇게 식사를 조금 준비해서는 내 성에 차지 않는걸♡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해준 인간들도 함께 먹어버리는 수밖에……♡"
"헛소리를……!"
"아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구나♡ 그러니 강도로 오해할 만도 하지♡"
시트리는 허리를 굽혀 무대 위에서 인사하는 배우처럼 우아하게 인사했다.
"내 이름은 시트리. 너희 인간의 방식으로 소개하자면 쾌락의 악마야♡ 너의 가족들이 제물을 바쳐 나를 이곳으로 불러냈지♡"
"뭐? 악마? 우리 가족이 당신을……불러냈다고?"
자비엘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쾌락의 악마? 제물? 혐의를 피하기 위한 미치광이 강도의 헛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비엘의 뇌리에 기억의 한 장면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날, 박물관에서 구독하는 신문 한 면에 실려 있던 사교도 집단 자살 사건의 기사였다. 새로운 시대로의 변혁을 꾀하면서 겪게 된 사회적 진통 중 하나였다. 구교(舊敎)가 과거의 위광을 잃고 물러난 후 새로운 종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십여 년 전, 자비엘이 학생일 무렵이었다. 구교의 독점 시대보다 사람들은 야만적으로 변해갔다. 과연 이 사회는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그 기사를 보았던 자비엘의 감상이었다. 정체 모를 종교에 빠져 그와 소홀해진 가족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의 가족들은 과격한 성정은 아니었으니 그런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과거의 자비엘은 신문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더란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리석었다.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자비엘의 초록빛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시트리는 그런 자비엘의 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투명하게 흔들렸다. 제법 마음에 드는 빛깔이었다. 저런 보석 같은 눈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시트리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이 인간과 계약하기로. 이 인간과 같은 핏줄을 가진 이들의 피로 소환되었으니 거리낄 점도 없었다. 여차하면 계약 사항만 대충 이행한 뒤 죽여 버리면 된다. 인간은 모두 약하고 언젠가 먼지로 화해 스러지는 필멸의 몸을 가졌으니까.
시트리가 손을 뻗어 검을 잡고 있는 자비엘의 손을 당겼다. 곧바로 이어진 장면에 자비엘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으로 시트리는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멀쩡하게 두 발로 서서 미소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트리의 상의에 붉은 얼룩이 번졌다. 뒤이어 시트리는 손을 뻗어 자비엘의 오른쪽 눈을 감기고 엄지로 눈꺼풀 위를 어루만졌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자비엘은 질색하며 몸을 물리려고 했으나 어찌 된 일에서인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자비엘은 자신을 구속하려 드는 알 수 없는 힘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시트리의 손을 쳐냈다. 그러나 눈가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오는 바람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비엘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시트리는 태연하게 말했다.
"자, 이것으로 계약은 성립됐어♡ 네 눈동자가 마음에 들어서 계약의 증거로 내 눈 한 쪽과 바꿨는데 어때?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한 쌍일 때보다 따로 떨어져 있을 때 더 잘 어울리는걸♡"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통증을 이겨내는 데 정신이 팔려있던 자비엘의 귀에 시트리의 말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끙끙거리며 애를 쓰는 자비엘의 모습은 마치 나뭇가지에 걸린 뿔을 빼내려는 사슴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 모습이 제법 재미있었던 시트리는 미끄러지듯이 자비엘에게 다가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오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귀에 속삭였다.
"너무 아파하는 거 아니야? 우리 달링……♡ 하지만 자기가 나한테 냈던 상처인걸♡ 물론 이제 자기의 상처가 되어버렸지만……♡"
"누가 당신 자기……읍?!"
겨우 입 밖에 내었던 자비엘의 반박은 갑작스레 부딪쳐 온 시트리의 입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입술이 맞닿고 말캉한 혀가 자비엘의 입 안으로 침입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금세 상황을 파악한 자비엘은 입 속의 침입자를 깨물어 쫓아내고 시트리를 밀쳐냈다. 그리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움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구역질을 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트리는 그런 자비엘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자비엘이 위장에 들었던 모든 것을 게워내고 나자 시트리는 자비엘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지그시 잡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자기가 좋든 싫든 이제는 나의 계약자니 잘 부탁해♡ 앞으로도 나를 이렇게 즐겁게 해달라고?"
강제로 시선이 붙잡혀 시트리와 얼굴을 마주하게 된 자비엘은 그제야 시트리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생기 없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 옆에 오후의 마지막 햇살 한 줄기를 받아 부서지는 신록의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또한 그랬다.
자비엘은 자신의 작업실에 있던 표범 박제를 떠올렸다. 그것은 이제 작업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저주와 욕망으로 생명을 입은 채 자신의 영혼을 맛보기 위해 입맛을 다시면서.
202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