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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Like Crazy
2023. 6. 16. 13:39w. rino (@rino__kj)
“자기, 어디 가?”
들쩍지근한 호칭에도 슬슬 익숙해지는 요즘이었다. 자비엘은 얼마 전에 새로 맞춘 단화의 끈을 고쳐 맸다. 원래 구매하려 했던 것과 다른 종류지만, 실제로 신어보니 원래 사려고 점찍어두었던 것보다 훨씬 편했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벼락 맞는 것보다 싫어하는 그에게는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 상황이 더 나은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일은 희귀한 경험이었다.
“박물관을 구경하러 다녀올 겁니다.”
“오늘은 일하러 가는 날이 아닌데도 박물관에 가는 거야? 왜?”
“네. 애초에 박물관은 구경하러 오라고 꾸며놓은 장소 아닌가요.”
“사람 많은 장소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지, 나느은.”
등 뒤에서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약간 느긋해졌다. 갑자기 흥미로운 일이라도 생각난 모양이었다. 여전히 악마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자비엘의 입장에서 셈해 보면 까마득히 긴 세월을 살았으나 다양한 화제에 쉽게 싫증을 내는 성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비엘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질리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런 잠잠하고 각 잡힌 생활을 즐기는지 자비엘은 여전히 가늠하지 못했다. 갑자기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변덕을 부리며 시끄럽고 귀찮게 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서, 그는 악마의 말에 대체로 순순히 따르는 편이었다. 끈을 고쳐 매고 일어서자마자 등 뒤에서 뻗어 나온 팔이 자비엘의 등과 가슴께를 꽉 끌어안았다. 악마는 인간에 비해 따뜻한 편은 아니지만, 자비엘 주변에 있는 생물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 중에는 제일 따뜻한 것이었다. 자비엘의 세계를 이루는 생물들은 대개 생명력과 체온을 잃은 것들이었기 때문에. 악마에게서 생동하는 생명력을 느낀다니 꽤 모순적이군. 자비엘은 악마가 팔을 풀고 물러날 때까지 서서 기다렸다.
“스킨십을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면서, 이럴 때는 왜 얌전할까?”
등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비엘은 몸을 돌려 악마를 마주보고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잠깐 고민하고 몸을 돌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금방 뺨까지 닿을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고 히죽거리며 웃는 이와 눈이 마주치자 역시 그냥 문을 열고 집을 나설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이보다 웃음으로 일관하는 이가 더 상대하기 어려웠다.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겁니까?”
“아니?”
“그래서 아무 말 안 한 겁니다. 내가 하지 말라고 반응하는 것까지 예상해서 즐길 테니까.”
“내 계약자가 영특해서 흡족한걸.”
악마가 팔을 뻗어 자비엘의 턱 끝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냥 말하면 되는데, 꼭 이런 걸 하고 싶어 하지. 무슨 장난을 칠 생각일까? 남이 보기에는 키스하기 5초 전처럼 보이겠지만, 악마는 뻔한 상황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다. 악마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기 전에 잊은 거 없어?”
…진짜 키스할 생각인가? 아니면,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라는 건가? 후자라면 지금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자비엘이 연애 감정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한들, 이 정도 상식과 눈치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어차피 읽지도 못할 악마의 머릿속을 헤아리기 위해 잠시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악마가 턱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지금까지 머리를 굴린 게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내가 아까 ‘왜’라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 했잖아. 자기.”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에 자비엘이 가만 서서 눈을 깜빡였다. 고작 그 정도의 사소한 동작만으로 자비엘의 머릿속을 다 헤집어 본 것처럼, 악마가 짓궂게 웃었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자기, 무슨 생각한 거야? 라고 놀리는 목소리가 귀에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자비엘이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어차피 승부도 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악마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제가 만든 박제 표본을 보러 갈 생각입니다.”
“만들면서 실컷 봤잖아.”
“제 일은 표본을 만드는 것까지고, 그것을 그럴듯한 액자나 전시장에 담아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니까요. 공방에서 표본을 보는 것과 조명 아래에 장식된 표본을 보는 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건가? 그럼 나도 같이 갈래.”
“다른 사람들 눈에 띄기 싫습니다.”
“눈에 안 띄기만 하면 나랑 데이트해도 괜찮다는 뜻?”
악마가 성큼 자비엘을 스쳐 지나가는 듯하더니 그의 손을 낚아채며 현관문을 열었다. 일련의 동작이 너무 빠르게 이루어져 뭐하냐고 따질 틈도 없었다. 사람들 눈에 띄기 싫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아무도 엉거주춤 밖으로 나온 자비엘에 주목하지 않았다. 각자 갈 길을 가기 바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게 숨는 것 정도야 내가 저기 걸어가는 사람 손목 비트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야.”
“먼저 말하고 행동으로 옮길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요.”
“미리 말하면 서프라이즈! 한 느낌이 없잖아.”
먼저 앞장선 주제에, 악마는 응당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이 턱짓했다. 박물관까지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자비엘은 여전히 손을 붙잡힌 채로(세간에서는 이걸 손을 맞잡았다고 표현한다) 걸음을 옮겼다.
“박물관까지 가는 동안 내가 인간 박제 표본을 본 이야기를 해줄까?”
“미라 이야기입니까?”
“아니. 그건 붕대로 둘둘 감아놔서 인간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 내가 깨끗하게 박제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
“나중에 인간을 박제할 기회가 생겼을 때 참고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당신의 능력으로 행한 일이라면 참고는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들어보긴 할까요.”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자비엘의 눈이 잠깐 총총하게 빛난 것을 악마, 녹티스는 놓치지 않았다. 아마 합당한 기회가 온다면, 자비엘은 인간을 박제할 순간을 거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에 잔혹하고 악한 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즐기는 업으로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새로운 일을 할 기회가 온다면, 그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듯해서. 인간이 듣기엔 퍽 허무맹랑하지만 녹티스에게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평범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조명 아래에 걸린 표본을 구경할 계약자의 눈빛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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