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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ffed Dancing Hall
2023. 9. 12. 08:50w. 0 (@xngkgkB)
0 님께서 써주신 뱀파이어 AU 글입니다. (*세계관, 설정 상이)
# Stuffed Dancing Hall
“자기, 이거 봐. 귀족의 직인이네~.”
녹티스가 어느 날 오후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하는 말이었다. 자비엘 비넷은 그때 막 점심식사를 마친 뒤였으므로 포만감에 좀 졸린 상태였다. 서류들과 함께 서재 의자에 늘어져 있다 녹티스가 확인이 꼭 필요한 편지들을 걸러내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중 한 봉투에는 그의 말마따나 고급스러운 직인이 찍혀 있었다. 자비엘은 턱을 매만지며 봉투를 들고 잠시 생각했다. 캐번디시, 아, 명망 있는 뱀파이어 귀족 가문이었던가. “확인해보지 그래♡” 녹티스가 봉투를 들고만 있던 자비엘에게 넌지시 종용했다. 그러면 자비엘은 하품을 한 번 하고 즉각 봉투를 연다. 그는 흠, 소리를 내더니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내용을 죽 빠르게 훑어본 뒤 내려둔다.
“가야겠습니다.”
“으음, 무슨 내용인데?”
“초대장입니다. 사교 파티. 귀족을 비롯한 몇 자본가와 사업가를 같이 초대했다는군요.”
“좋은 기회네~.”
“예, 인맥은 많으면 좋으니까요. 그들을 ‘인맥’이라는 말로 소개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비엘은 대답하며 의자에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녹티스는 저택 관리에 대해 그 소유주인 자비엘 비넷이 알아야 할 몇 가지를 더 브리핑하고 도로 책상 위를 봤다. 그의 눈길이 아까 읽고 내려둔 캐번디시의 초대장에 닿는 것을 보고 자비엘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다.
“왜,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 음~ 파티니 만큼 신경을 써야겠다 싶어서요.”
“당신이 신경 쓸 게 뭐 있어요. 가서 저만 잘하면 되지.”
“자기야, 옷 골라줄까?”
“왠지 당신이 들뜬 느낌인데.”
“하하, 그럴 리가♡”
녹티스를 만나기 이전 자비엘 비넷이라는 ‘인간’의 삶이란 지루하기 그지없는 박제사의 것이었다. 그가 녹티스를 만나게 된 이후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비엘이 당한 불의의 사고 혹은 흡혈귀로부터의 피습을 먼저 살펴봐야 했다. 비넷이라는 가족의 이름이야 언제고 그 당시에는 자비엘 본인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온갖 미신적인 삿된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름이었으므로, 자비엘이 간만의 편지를 받고서 본가에 들렀을 때 그들이 을씨년스러운 집을 비운 것은 놀랄 만한 행보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족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간 자비엘은 곧 그들이 집을 비운 것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바싹 마른 시체로 쓰러져 자신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살가죽의 핏기만 완전히 빨린 채로 기이하게 비틀린 시신을 보고서 입을 틀어막았을 때 자비엘의 정신은 순식간에 명멸했다. 어떤 것이 그의 뒤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몰이해로 시작되는 것들이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 이미 끝나 있기 마련이다. 자비엘 비넷이 ‘다시 살아났을 때’ 그는 극악한 확률을 뚫고 새 생명이자 기적 같은 반불멸을 얻은 뱀파이어가 되어 있었다. 어지러운 정신과 때로 치미는 갈증을 눌러 참으며 자비엘은 그때에야 가족들이 연구하던 자료를 이 잡듯 뒤지며 스스로의 상태와 그들의 죽음의 원인에 관해 실마리를 찾아냈다.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실재를 믿을 수 없는 미신적인, 삿된 것들…… 가령 뱀파이어와 악마. 지옥과 영생. 인간을 하등한 하위 종으로 분류하는, 선의를 조롱하고 삶을 모독하는 존재에 대해서.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살아가는 사회가 있다는 점은 그러므로 자비엘 비넷에게는 좀 충격이었다. 한 번 까무러쳐 죽어 다시 살고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다니. 그저 무던하게 보편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그의 욕망이었음에도.
그리고 사흘 밤낮을 갈증에 허덕이는 목께 붙들면서 ‘생전’에는 쳐다도 보지 않던 서적을 뒤지고 있을 때에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나 굶어 죽겠어~.
정작 그 존재를 불러놓고 죽어버린 가족의 시신은 이제 썩어들고 있고, 여름 숲의 녹음이 아니라 어디까지 그 깊이가 닿는지 모를 늪 같은 녹색을 지닌 악마가 등장한 것이 그 시점이었다는 뜻이다. 성질머리를 버릴 대로 버린 자비엘이 욕설 뇌까리듯 그에게 알고 있는 전말에 대해 설명하자 녹티스는 그저 악마의 계약 중 인간이 아닌 지성체가 그 계약자가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며 웃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둘의 관계는 녹티스의 그 다음 말로부터 시작됐다.
자기♡의 욕망을 내가 이뤄줄게. 막 태어난 갓난♡뱀파이어로서 살아가는 거 악마의 도움이 없다면 힘들다구?
…….
자, 일단은 피를 빠는 것부터.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악마가 선뜻 팔을 내밀었다. 그때 자비엘 비넷은 목이 말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동시에 허겁지겁 그의 팔을 ‘갓난’ 이로 무는 자신이 역겨워서 미칠 것도 같았다.
이후 뱀파이어 사회에 스며들기 위해 이 악마와 함께 자비엘은 부단한 노력을 했다. ‘권속’의 형태로 둔 악마는 숲속의 고저택을 매매하며 집사 노릇에 재미가 들렸다. 인간을 멸시하고 피식되는 종족으로 보는 것치고는, 뱀파이어의 사회 역시 놀랍도록 인간의 것과 닮아 있었으므로 자비엘은 가까스로 그 안에 편승할 수 있었다.
녹티스에게 곧잘 이것저것 물어 가져오다 질려 던져버리는 일―본인의 이야기로는―은 꽤 잦았으나, 자비엘과의 ‘저택 집사 놀이’는 꽤 오래도록 그의 흥미를 끄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이것은 빠지지 않아 녹티스는 업무의 마감을 보고하기 위해, 혹은 그러한 흉내를 내기 위해 자비엘이 있는 서재로 들어온 것 같았다. 자비엘은 그가 말썽만 피우지 않는다면 그의 ‘놀이’에 잠자코 맞춰줄 생각으로 녹티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녹티스는 창문 너머로 화려하게 타오르는 노을을 보다가 문득 자비엘에게 엉뚱한 것을 물었다.
“자비, 춤 출 줄 알아~?”
그 말을 들은 자비엘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 그 파티 얘긴가. 석양을 등진 탓에 그의 얼굴에는 얼핏 보랏빛 음영이 드리웠다.
“무복을 골라줄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 자기. 빼기는~♡ 어쨌든 이런 게 자비 취향 아닌 건 알고 있다만.”
“어쨌든, 춤이라면 당연히 배웠지요.”
자비엘은 녹티스가 말하는 ‘어쨌든’을 반복하며 거기에 강세를 뒀다. 물론 자비엘 비넷의 성장환경을 보자면, 어릴 때에 연회 같은 곳을 자주 다니지는 못했다. 자비엘 비넷은 문득 자신이 상류 계급의 문화에 따라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춤을 배웠던 것을 짧게 떠올렸다. 고작 박제사로 일하고 있었더라도, 그리고 지금에는 사람에서 흡혈귀가 된 최하위 계층에 속한다고 해도 그때그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또한 자비엘 비넷의 습성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드러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고자 한다면 어떤 기회든 잡을 수 있었다.
책상 앞에 서 있던 녹티스가 창 너머에서 시선을 떼고 자비엘을 바라본다. 그 사이 태양은 황홀하게 몰락한다. 녹티스가 꿋꿋이 물었다.
“어느 포지션의 춤? 배운 거 말이야, 자기.”
성가시기 짝이 없게 굴지, 하여튼. 자비엘은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녹티스의 지근거리에 섰다. 본래 녹티스에 비해 한 뼘 반 정도는 차이가 나는 신장이었다. 그는 대답한다. “리드하는 쪽입니다. 제가 키가 큰 탓에 반대는 거의 쓸 일이 없었던지라.” 녹티스가 입매를 당겨 웃었다. 그러면 좀 아연한 얼굴로 자비엘이 물었다.
“그런데 뭘 하려고 그럽니까.”
“혹시 모르니까♡”
“……당신이 리드하려고요?”
“연습해둬서 나쁠 건 없지 않나? 세상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이 많던데♡”
“정말이지 인외 같은 발언이군요……. 게다가 이제 전 인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바투 붙었다. 묵언의 수락이다.
녹티스는 멀뚱히 선 자비엘의 허리에 손을 얹고, 다른 포지션을 해본 적 없는 그의 자세를 고쳐준다. 음악이 없다는 것이 몹시 어색하다. 이곳은 무도회장도 아니고, 하나는 정장에 하나는 집사복. 굳이 낭만을 찾자면 저 다 져가는 황혼에서겠다.
녹티스가 스텝을 먼저 옮긴다. “하나, 둘.” 그가 중얼거리듯 말하면 자비엘 비넷은 따라 걸음을 느리게 옮기면서 새삼 춤을 처음 배울 때를 떠올린다. 일면식도 없는 그 시절의 상대는 하류 계층의 이들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벌어먹고 사는 늙은 무용수였다. 어린 자비엘 비넷은 그에게 돈을 벌 것이라고 말한다. 무용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낯으로 그 시절의 자비엘에게 말했다. 키가 크니까 춤을 리드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어. 보통 춤 상대는 리드를 원하는 이들이 많지. 성공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해. 성공하려면……. 그때의 자비엘은 광신에 빠진 가족들과 찌든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주 보통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죽은 것들을 산 것처럼 박제하면서도 사실 정말로 박제하고 싶었던 것은 제 발버둥치는 삶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비엘이 기억을 더듬어 발을 뒤로 물리면 녹티스가 “잘 하네.” 하고 따라 스텝을 맞췄다. 하나, 둘, 셋. 왈츠의 삼박자. 기본 동작을 익힌 다음에는 턴. 그가 잡은 손을 공중으로 치켜들면 자비엘은 서툴게 한 바퀴를 돌아 팔을 펼친다. 서재가 넓은 게 다행이었다. 자비엘이 중얼거렸다.
“역시 음악을 틀 걸 그랬습니다.”
“흠, 자기. 음악이 없으면 아무래도 집중이 안 돼?”
“분위기라는 게 있잖습니까. 잡생각도 안 들고.”
“서재에서 무슨 분위기를 찾아♡ 그리고 익숙한 사람들은 춤추면서 얘기들 하지 않던가……. 자, 다시~.”
다시, 하는 말에 자비엘은 녹티스의 품에 안기듯 돌아온다. 자세는 둘 다 똑바르다. 네 개의 구둣발이 엉키는 일은 없다. 다만 그의 팔이 벌린 틈으로 들어가면서 자비엘 비넷은 처음 흡혈했던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당신이야말로, 악마면서 인간의 춤을 곧잘 추십니다.”
“어둠에서는 많은 게 보이거든♡ 자, 이제 마지막.”
가볍게 말하면서도 녹티스가 정중히 인사한다. 신사의 태다.
“수고했어~.”
“수고했습니다.”
자비엘은 잠시 고민하다 허공에 손을 들어올렸다. 으레 무복을 입은 여성들이 춤이 끝날 때에 그러는 것처럼, 없는 드레스자락을 집어 올리듯. 그러면서 짧게 생각한다. 아마 배웠더라도 이 춤을 써먹을 곳은 없겠지, 하고.
검푸른 색의 정장을 입고 찾게 된 캐번디시 후작가의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자비엘은 몇 번 이미 춤을 췄다. 대부분은 상대가 걸어오는 쪽이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하나같이 키가 그보다 작은 여성들뿐이어서 자비엘이 녹티스에게 배운 춤을 굳이 쓸 필요는 없었다. 자비엘 비넷은 평소대로 신사적으로 춤을 추고 팔을 들어 올려 턴으로 펼쳐지는 드레스자락을 보다가 춤을 마치고 정중히 인사한다. 그 사이 적당히 오가는 사업상의 대화도 잊지 않았다. 얼마쯤 어울리고 난 다음에는 비치되어 있는 와인 같은 붉은 핏물을 마시며 벽에 기대서서 사람들을 주시한다.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자금줄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딴 생각이 났다. 녹티스의 이야기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이 많던데♡ 그래도 그 말에 아주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니 당신 같은 이도 만났겠지. 그런 시시한 생각이나 하다가 자비엘 비넷은 불현듯 자신이 그를 사람이나 다름없이 여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여기에 ‘사람’은 없는데도.
우리는 그냥 박제일 뿐이야. 여기에 그대로 멈춘 삶이지. 인간의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절단하듯 그만둔다. 사고의 단면이 말끔하다.
20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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