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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024. 2. 19. 12:52* 겨울 테마 외 배경설정 등 전체 일임 소설로, 언급되는 국가는 실제 세계관 내 배경 국가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무제
w. Febuary ( @abcdefg11)
눈이 아릴 정도의 하양 따위, 겨울의 런던 교외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단어였다. 어느 화가가 그린 순백의 그림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다 걸음을 옮긴 자비엘은 그다음에 걸린 그림 앞에서는 채 5초도 서 있지 않고 움직였다. 처음 몇 점의 그림 앞에서 보낸 시간을 제외하면, 갤러리 전체를 도는 데 30분조차 투자하지 않은 셈이었다.
“이런~ 자비, 달링.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나 보네?”
어지간한 영국인의 키를 훨씬 웃도는 녹색 머리칼의 미인이 힐 소리를 내며 박제사에게 말했다. 그가 도망이라도 갈세라 코트 차림의 팔에 양 팔을 단단히 감고, 심드렁한 낯을 한 뺨에 뾰족한 손톱 끝을 콕 가져다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그런 표정 짓는 건 드물잖아~”
그에게 내줄 만큼 내줬기에 손톱 따위로부터만이라도 닿고 싶지 않았던 자비엘은 노골적으로 고개를 뗐다. 갤러리에서 퇴장하는 건 일사천리였다. 그는 방명록도 쓰지 않았다.
“자기만의 허황된 망상으로 예술을 하는 사람의 뇌내란 응시할 가치가 없는 법입니다.”
“어머어머, 이런 답지않은 혹평이란! 왜애~? 나는 꽤 보기 좋던데~ 아주 정교한 파라다이스 아니었어~? 겨울에는 천국처럼 눈이 쌓여 있고, 여름에는 풍미 가득한 산해진미가 대항해시대처럼 널려 있으며, 봄에는 아리따운 인간들과 티타임을! 가을의 정취는 살짝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계전(四季傳)이었어!”
“물론 그러시겠죠. 당신은 본인의 쾌락을 위해 남을 팔아치우는 인간을 기특하게 보는 경향이 있으니.”
쾌락의 악마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는걸♥ 어디 보자, 내가 맞춰 볼까? 겨울의 그림에 남아 있던 미황색 분진. 그걸 본 거지?”
자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피와 보석으로 몸을 빈틈없이 치장한 사람들을 지나 시가지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에게 찰싹 달라붙은 녹티스가 꾀꼬리같은 톤으로 해설을 읊는 건 물론이었다. 친애하는 독자를 위해.
“최근에 대성황을 타고 있는 싸구려 마약의 원료지. 좋은 건 물감 만들기에 쓰고, 허접한 건 잿더미에 섞어버리고. 그러다 한 화가가 마약 반응으로 경감에게 끌려간 게 뉴스에 실린 이래, 사람들이 땅바닥에 버리기 시작한 걸 주워먹기 시작했다지~? 누군가는 그 성분에서 영감을 얻어 분진을 사람 체액에 섞어다 예술에 이용한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아주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필경 제게 전시회를 권유하신 까닭과 같으시겠죠.”
“후후, 당연하고 말고. 내가 저기 모인 인간들의 목과 손가락에 눈길 한번 안 준 이유와도 같지 않겠어, 달링?”
깜찍하게 윙크를 하는 녹티스를 보며 질리고 피곤하단 표정을 지은 자비엘은 혼잡한 구역 바깥에서 장사를 하는 카페테리아의 문을 열어젖혔다.
“어라어라,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림 냄새가 역해서요. 잠시 앉았다 가야겠습니다.”
악마는 그 말에 안 좋은 공기를 쐰 아이라도 다루는 양 자비엘을 끌어안았고, 영락없는 한 쌍의 커플로만 보이는 두 사람에게 주문을 받은 직원은 원두를 가는 곳으로 향했다. 둘 모두 무엇을 시킬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여기에는 그들이 선호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녹티스는 그렇지만도 않겠지만.
갤러리에서 진동한 냄새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는지 자비엘은 드물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 앉았고, 녹티스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양 손을 깍지낀 채로 색이 다른 두 눈을 즐겁게 빛냈다.
“원한다면 진짜 설국을 보여줄게♥ 거기서 나랑 데이트 하는거야, 자비!”
“사양하겠습니다.”
“왜애? 지난번 겨울 휴가는 너무 짧았잖아! 리프레시를 해주지 않으면 인간은 금방 바래버린대도! 진짜 설국은 달라~ 아름답고 서늘하다구? 자비도 분명 마음에 들걸?”
“절 바래게 하는 건 당신입니다, 녹티스. 다 아는 소리 하게 하지 마시죠.”
“어머! 이렇게 기습고백 하는 거야? 아이 참, 자비는 바보, 선수~! 자비에게 놀아난 존재들 가엾어! 아아, 가여운 나!”
익숙하게 과장하는 몸짓과 표현에 반사행동처럼 미간을 꾹 누른 자비엘은 점원이 다가와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멀어지자마자 커피잔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코끝으로 들이닥치는 원두 향이 그의 신경을 약간은 환기시켜주는 데 성공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겁게 웃던 녹티스도 마찬가지로 커피를 한 입 홀짝였다.
“낙원 같은 건 현실을 추구할 방법과 목적을 잊은 자들이 그리는 허상입니다. 한 번의 휴양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고요. 지금 이 순간 실재하는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대신 허황된 관념에 눈을 돌리고자 재산이며 양심이며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들의 지향점을 연상시키는 장소 따위 완곡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익숙한 이론, 익숙한 논리. 익숙하고 익숙한데 도무지 질리지도 않는 눈 앞 인간의 말이 즐겁기 짝이 없어 녹티스는 기분좋게 웃었다. 설국으로의 이동 따위 굳이 그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녹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굳이 그렇게 하는 일은 적을 터였다. 그가 말하는 걸 듣는 일도, 그를 말하게 내버려두는 일도 이렇게나 귀여우니까. 자신의 보랏빛 눈이 자비엘의 얼굴 조형 안에서 자비엘만의 표정을 짓는 일을 바라보는 건, 이다지도 황홀했다.
그래서 녹티스는 투정부리는 양 이야기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힘써볼게, 자비. 나는 자비랑 설원에서 근사한 쾌락을 취하고픈 욕망이 있으니 말야♥”
이번에도, 자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최악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나 연거푸 들이킬 뿐이었다.
20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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