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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엇나감
2024. 3. 4. 08:29w. rino (@rino__kj)
자비엘이 표본 제작 시 사용하는 약품이나 공구를 구매하는 상점은 그의 작업실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 자리 배치가 이렇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낡은 나무 간판에 주인의 이름만 새겨놓고 장사하는 수상쩍은 가게 근처에 가게 외벽을 파스텔톤으로 깔끔하게 칠한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꽃집. 액세서리 전문점. 미용실. 보석 전문점. 사람에게 내재된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쪽의 감정과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을 지나쳐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약한 조명. 드문드문 먼지가 쌓인 진열대. 갖가지 약품 냄새가 섞여 만들어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냄새. 오히려 이쪽이 자비엘의 마음을 움직였다. 내 마음속에도 욕망이 있다면 이런 모양새인 거겠지. 그는 덤덤한 얼굴로 안경을 치켜 올렸다.
“저번에 부탁한 건 들어왔습니까?”
“여기 있어. 네가 주문하는 게 거기서 거기지, 그럼.”
검은 포장지에 싸서 종이봉투에 넣은 물건을 건네주는 주인은 언제나 그렇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친절과는 거리가 먼 태도였지만 자비엘은 고개만 한 번 까딱이고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허허실실 웃거나 장난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집에 가면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자기야, 같은 낯부끄러운 줄 모르는 호칭을 쓰며 집 소파에 앉아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보지 않아도 정신이 피로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피곤해진다 해서 자비엘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계약자인 그를 두고 녹티스가 어디로 갈 일도 없거니와 그는 자비엘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아 그냥 악마는 취향이 이상하다 정도로 결론 지었다. 명색이 악마인데 취향이 멀쩡한 것도 이상하지. 계산을 마친 자비엘이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새 영업을 시작했는지 꽃집 앞에 진열된 꽃이 보였다. 봉오리가 반도 열리지 않은 꽃무더기를 보니 몇 주 전에 녹티스가 대뜸 품에 안겨주었던 꽃다발이 생각났다.
작업실에 장식이라도 해놔. 거기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 자비엘은 조명도 완벽하게 구비해놓은 작업실이 뭐가 어둡냐고 반박할 만큼 문장의 맥락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바짝 마르고 생기 없는 것만 가득한 곳. 생활감이 있는데 이렇게 생기가 돌지 않는 공간도 드물 것이다. 자비엘은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잎에 맺힌 물방울이 마르지도 않아 싱싱했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을 꺼리는 사람은 없다. 활기와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굳이 꽃을 돈 주고 사지 않았을 뿐이다. 녹티스의 얼굴에 매달린 미소에 숨겨진, 이 꽃을 선물한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잠시 눈을 마주쳤던 자비엘은 제가 악마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렸던 적이 거의 없음을 금방 깨달았다. 꽃병을 하나 사야겠군요. 온갖 질나쁜 농담과 영문 모를 행동을 일삼는 기분 나쁜 녀석이지만, 하나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면 그가 함부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계약의 증표로 눈을 교환했을 때를 제외하고 녹티스가 장난으로라도 그에게 상처를 입힌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 꽃은 그냥 선물일 것이다. 시들거든 드라이플라워로 만들면 어때? 바짝 말려서 전시하는 게 네 전공이잖아. 꽃병으로 쓸 만한 유리병을 찾기 위해 찬장과 장식장을 뒤지는 자비엘에게 녹티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꽃은 동물이나 곤충보다 훨씬 형태를 보존하기 어렵다. 드라이플라워는 박제나 표본 제작과는 다른 영역인 것 같은데…. 장식장 구석에 박아둔 유리병의 먼지를 닦으며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적당한 타이밍에 꽃을 말려 액자에 걸어두었다. 자신의 공간에 걸어두기 위해 무언가를 박제한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던 걸까.
“나도 뭐라도 사 볼까.”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 조금 놀랐다. 타인을 생각하며 물건을 산다. 이건 ‘선물’이 아닌가. 내가 악마에게 선물을 준다고? 자비엘은 투명한 전시장 너머에 진열된 반짝이는 것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을 전시장 너머에서 꺼내 손에 쥐고 싶다고 생각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물며 타인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게 언제였는지는 셈하려고 해도 어렵다. 나답지 않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건 통제된 환경을 선호하는 그의 성향에 반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눈에 띈 액세서리 전문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명랑한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짧게 눈인사를 한 자비엘이 투명한 유리 너머에 전시된 색색의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꽃에 대한 답례로 보석을 사면 이상한가? 꽃과 달리 보석은 좀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꽃은 한시적인 느낌이지만 보석은 오랫동안 남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말없이 구경만 하는 그가 무엇을 살 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점원이 살갑게 말을 붙였다.
“누구한테 선물하시나요? 남자? 여자?”
“...남자에게 선물할 생각입니다.”
악마에겐 정해진 성별이 없다. 그가 원한다면 어떤 몸으로든 바뀔 수 있지만 평소에는 남성체에 가까운 몸으로 존재하고 있으니, 자비엘은 악마에 대해 무지한 사람에게 그를 남자라고 답했다. 인간은 복잡한듯 하면서도 꽤 단순하다는 악마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라면 반지 어떠세요? 요새 장식 없이 심플한 걸 많이 찾으시거든요.”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 성격이라… 그쪽으로 보여주세요.”
“이쪽 라인으로 한 번 보세요. 알이 굵은 거 좋아하시면 저쪽이 좋은데 단가가 좀 높아요.”
악마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자비엘은 작은 에메랄드와 표면에 문양이 각인된 반지 한 개를 골랐다. 너무 수수한 것은 받고도 그리 만족스러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비슷한 디자인으로 하나 더 보여드릴까요?”
“네?”
자비엘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점원을 쳐다보자 그는 오히려 되묻는 자비엘이 더 묘하다는 표정이었다.
“커플링으로 구매하시는 게 아니신가요?”
“아. 커플링….”
보편적으로 남에게 보석이 박힌 반지를 주는 건 그런 의미였지. 뒤늦게 깨달은 자비엘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일단 인간도 아니고. 그는 무심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최대한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지만 박제사 일을 하며 생긴 자잘한 상처가 곳곳에 남은 손은 반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약품을 자주 다루는 일이니 보석이 상할 확률도 높았다. 반지를 끼기엔 조금 거추장스럽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것에서 상황을 대충 파악한 점원이 웃는 얼굴로 잽싸게 반지 상자를 꺼냈다. 사소한 일로 손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 개든 두 개든 팔면 그만이다.
“요새는 생일 선물로도 반지 자주 구매하시죠. 제가 섣불리 판단했네요. 사이즈는 어떻게 되시나요?”
“사이즈는… 키가 이 정도고 손 크기가 대략 이 정도입니다.”
“어느 손가락에 착용하시나요?”
“아마 검지…정도일 것 같습니다.”
“네. 그럼 이 정도면 되겠네요.”
악마의 신체 사이즈 같은 것은 몰랐다. 몸짓을 이용해 대략적으로 신체 사이즈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점원은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상자에 넣었다. 만약 손에 맞지 않으면 목걸이로 만들어 걸든 반지에 몸을 맞추든 알아서 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반지가 담긴 상자보다 조금 더 큰 종이 상자에 보라색 리본까지 둘러 포장해준 그가 자비엘에게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받으시는 분이 좋아해주시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자비엘은 상자를 종이 봉투에 넣고 가게를 나왔다. 커플링이란 단어가 머리에 잠시 맴돌았다. 이미 계약으로 속박된 관계인데, 반지까지? 너무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행위로 느껴져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작업실에 작업 도구를 내려놓고 집으로 향했다. 바로 선물을 건넬 생각이었다. 아마 작업하는 내내 선물을 내밀 타이밍을 생각하게 될 것 같아서.
“어서 와. 오늘은 조금 일찍 왔네.”
문을 열고 들어오자 현관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비엘이 신발도 벗기 전에 대뜸 상자를 내밀었다. 손바닥만한 상자를 받아든 녹티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게 뭐야?”
“반지입니다.”
포장을 풀고 반짝이는 보석을 확인한 녹티스가 입매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이걸 왜 주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아마 인간에게서 재미 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굳이 묻지 않았다. 나름 선물이라고 머리를 굴렸을 그를 생각하니 이미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에.
“내 손가락에는 좀 작은걸.”
“나름 큰 걸로 사 왔는데 역시 작습니까? 검지에 안 맞으면 다른 손가락에 껴도….”
“여기에 손 크기를 맞추란 뜻인가? 자기는 손이 작은 게 취향이야?”
“...그런 취향은 없어요.”
“자기가 원한다면 손 크기 정도는 줄여줄 수 있어.”
그런 취향이 정말 있는지 모르지만 일부러 놀리는 투로 말하자 자비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약간 질색하는 듯이 보였다.
“손에 끼지 말고 목걸이로 만들어 달고 다니든 버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도로 내놓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 점이 여전히 흥미로웠다. 자비엘이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는 동안 녹티스는 검지에 억지로 반지를 밀어 넣었다. 새끼 손가락에 끼우면 얼추 맞을 것 같은 사이즈인데도. 보통 사람이라면 뼈가 아파 억지로 반지를 끼우는 것 따위 불가능했겠지만, 악마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살과 뼈가 잔뜩 눌리고 죄는 아픔이 밀려왔다. 여전히 악마는 웃고 있었다. 아픔에 강하고 욕망을 기뻐하는 몸이었으니, 이 상황에서는 아픔보다 기쁨이 더 컸다.
2024.02.29
* 작업자분께서 주신 글에 대한 TMI
- 녹티스가 자비엘에게 선물해준 꽃은 글록시니아 (꽃말은 욕망)
- 드라이플라워를 만들어 자기 공간에 걸어둔다는 건 자기가 ‘해볼까=하고싶다’ 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욕망을 실천한 케이스라고 생각해서..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그렇고.. 금욕적인 사람이 내재된 욕망 또는 새로운 욕망에 눈뜨는 건 (아직 무자각 상태지만) 재밌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썼는데 캐붕일 시 어떡합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ㅈㅅ합니다)
- 사귀지는 않지만 나름 정든 거 아냐? (일단 이 이야기의 배경은 계약한지 몇 달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느낌인데.. 녹티스가 겁나 치대서 순식간에 어어시발이게뭐야식 정이 든 게 아닐까요? 라고 나 혼자 생각함 캐붕일시 ㅈㅅ합니다) 그래서 답지 않은 행동을 한 거임.. 걍 아나시발나왜이러지 하면서.. 그러고 있음.. 그런 게 재밌을 거 같아요
- 꽃에 대한 답례로 보석을 사는 것.. 둘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뭔가 관계가 진전될 수록 자비엘 쪽이 무거울 것 같음 (여러가지 의미로)
좋아하는 지인분께서 일임으로 즐거운 글을 작업해주셨습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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