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러브 코미디 ~악마도 질투를 느끼나요?~
2023. 5. 17. 22:09w.hakano(@ayakashiphobia)
물안개, 묘지, 까마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선명하게 보이는 것으로. 시체, 인간, 미트 파이. 흩어지는 것으로부터 가득히 채워지는 것으로. 사슴 뼈, 박제사, 악마. 차가운 것으로부터 뜨거운 것으로. 가지각색의 것들이 사라졌다가 부수어지길 반복한다. 손에 들린 지나치게 밝은 등잔은 시야를 오히려 명멸시킨다. 빛에 순응하지 못한 눈은 기어코 누액을 흘리고야 만다. 볼을 타고 입으로, 그 안으로 향하는 눈물에서는 피와 같은 쇠의 맛이 난다. 아니야. 그것은 애초에 혈액이었어. 죽기 직전의 청둥오리가 그 주둥이로부터 뱉어낸 것은 명백히도 핏덩이였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숨이 막혀온다. 괴로워, 하고 말을 꺼내면, 세계는 간단히도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해서…….
자비엘이 땀에 젖은 채로 깨어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이렇게 불쾌한 기상을 하는 것은 실로 요며칠 이미 겪고 또 겪은 일이었다. 묘하게 기분 나쁜 꿈을 꾸는 것은 이제 특별할 것도 없이 자비엘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자비엘의 불운은 안타깝게도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 또 악몽을 꿨어?”
침대 옆 의자에 앉은 녹티스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악마는 실실 웃으며 자비엘을 바라보고 있다. 최근 빈도가 잦아진 악몽은 혹시 그의 탓일까. 자비엘은 짜증스럽게 이불을 제게 당겨 몸을 감쌌다. 일단은 악마잖아, 그런 걸 관장하는 악마여도 이상할 건 없지. 영 깊게 잠들지 못하니 마음에는 피로와 응어리가 쌓여간다. 판단을 할 때에도 완전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무슨 생각 해?”
“……당신이 혹시 제 꿈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잠시간 침묵. 그러나 녹티스는 이내 평소의 실실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다.
“내가 자비의 꿈을 조종할 수 있었다면, 진작에 조종해서 잡아먹었겠지?”
“하아…….”
“물론 에로틱한 의미로♡”
“하아아아…….”
이 악마가 제 악몽에 관여한다는 것은, 차마 생각해보고 싶지도 않은 가능성임에도 꽤 그럴듯하다고 자비엘은 이전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다. 범인이 녹티스였다면, 분명 진작에 ‘잡아먹었을’ 것이라고(그것이 정말로 섹슈얼한 함의를 담는지, 정말로 표범의 이빨로 물어뜯어 삼키는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자비엘 역시 충분히 결론 내릴 수 있었다.
그러면,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자비엘은 어느 밤을 기점으로 악몽 외의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다지 브랜디를 과하게 마시지도 않았고, 유독 특이점이 많았던 날도 아니었다. 그런 자비엘의 꿈에, 어느 순간부터 의문의 형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 이 길고 긴 무의식과의 싸움의 시작이었다. 눈을 뜨면, 어둠 속이다. 자비엘은 몇 걸음을 지면에 디뎌 보다가, 문득 이상한 동물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물은(…동물이 맞긴 할까?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자비엘에게는 제법 짐승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자비엘도 꿈속인 만큼 초반에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성싶었다) 처음에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의 근육이 올바르게 움직이고, 쉽게도 과속하여 장난을 치는 성미 따위가 꼭 그랬다. 그러나 어둠 속에 눈이 익숙해지기 시작할 쯤에는, 그것의 단단한 다리가 둘, 넷, ……다섯? 곤충이나 다지류를 제외한다면 평범한 동물로부터는, 더군다나 포유류라면 그다지 헤아릴 리 없을 개수의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의 꿈은 대부분 비슷한 양상이다. 자비엘 본인이 알지 못하는 문자가 눈에 선명히 비치고, 울렁이는 시야에서는 세상의 온갖 원질原質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꿈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반증이지만, 자비엘의 경우는 달랐다. 생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지식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이내 촛불이 꺼지듯 그것들은 쉽게도 사라져버린다. 무의식의 탓이라기에는 그 지식들은 자비엘로서는 처음 접해보는 것들이다. 게다가 악몽의 초기에는 꿈속의 지식들이 잠에서 깨는 것과 동시에 금세 휘발되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의식을 되찾고 나서도 미묘하게 잔존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신을 차린 뒤 약초학 책 따위를 찾아보면, 당연하다는 듯 꿈의 그 동물이 전해준 지식이 두꺼운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자연철학과 도덕철학 등도 마찬가지로, 일어나서 교차검증을 마치면 올바르나 모두 처음 듣는 지식들이다. 자비엘은 막연히 꺼림칙함을 느꼈다. 표정을 구기며 작업실의 의자에 앉아, 꿈의 원인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렇게 싫은 표정 하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거야?”
녹티스는 눈치가 빠르다. 인간의 비언어적 표현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 능했다. 자비엘은 이 사안에 대해 악마에게 말해도 괜찮을지를 고민했으나, 곧 홀로서는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어 근래의 꿈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런 일입니다.”
“자기, 혹시……, 꿈에 나온다는 그 동물, 다리가 많아?”
“……!”
“한 다섯 개 정도로?”
정곡이다. 녹티스는 그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자비엘은 실로 간만에 녹티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자비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으응……, 애매하네.”
“……애매하다는 건?”
방백에 가까운 혼잣말. 그러나 자비엘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꿈은 서서히 현실을 좀먹었고, 무엇보다도 종일 묘하게 피곤하여 본업인 박제조차도 길게 작업하기에 어려운 현황이었다.
“자비, 나 외의 악마를 소환한 적은 없잖아?”
“……당연하죠. 애초에 당신도 제가 직접 소환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갑자기 비수를 꽂네. 아무튼……, 아마도 자비의 꿈에 나오는 건, 악마일걸.”
“……네?”
생각지도 못한 회답에, 자비엘은 저도 모르게 바보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우스웠는지 녹티스는 히죽거리며 장난기 많은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솔로몬의 72 악마 중 10위……, 이름은 부에르.”
“하아…….”
“하지만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야. 철학이나 약초학에 능하고, 소환자에게 그걸 가르쳐 주기도 하…….”
“왜 말을 하다 마는 겁니까.”
“……정말로 악마를 소환한 적이 없어? 실수로 마방진을 그리고 피를 바쳤다거나…….”
“대체 뭘 하면 실수로 마방진을 그리고 피를 바치는 겁니까?!”
기겁하는 자비엘을 보며 녹티스는 묘하게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기묘한 소유욕이 내비치는 표정을 하는 녹티스를, 자비엘은 수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꿈을 그만 꿀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그것……, 부에르라고 했던가요, 그것이 나오는 꿈을 꿀 때마다 정신도 몸도 지쳐서, 제대로 일에 집중하는 것이 힘듭니다.”
“와……, 나보다 자비를 귀찮게 만드는 거야? 찾아가서 방법이라도 배우고 싶네.”
“나쁜 버릇을 하나 더 늘리지 마십시오.”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비엘에게 녹티스는 실쭉 웃으며 말을 잇는다.
“농담이야, 농담. 그보다 자신의 소환자도 아닌 자비에게 왜 찾아가는 것인지를 모르겠지만……. 우선은 도와줄게.”
“감사합니……잠깐, 왜 눕히는 겁니까?!”
녹티스는 간단히 자비엘을 안아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그 옆에 누워서는 자비엘의 손을 잡았다. 제 물음에 녹티스가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자비엘은 서서히 잠에 빠져간다…….
……언제나와 같은, 안개가 낀 어딘가에서 자비엘은 정신을 차린다. 이 꿈은 언제나처럼 리얼하다.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제 옆에 녹티스가 동행하고 있다는 것 정도. 녹티스는 웬일로 진중한 얼굴을 하고 물안개가 가득 낀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기색이 형형해서, 자비엘은 차마 말을 걸지도 못하고 굳은 채 녹티스의 기색을 살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안개 속에서 점차 실루엣이 드러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 5개의 말 다리, 사자의 얼굴을 한 악마. 그러나 이번에는 자비엘에게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듯, 자비엘의 시야는 별다를 것 없이 현상만을 향하고 있다.
“어째서 나를 방해하는가, 시트리.”
“네놈이 먼저 나의 계약자를 가로채려 들었으니까.”
숨이 막힐 만큼 날카로운 말투로 대적하는 녹티스……시트리를 자비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저 바라보고 있다. 맞아, 이쪽도 악마이긴 매한가지다. 평소의 장난 가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상대와 대치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맹수이며 악마였다.
“소환자가 아니면 네 알량한 지식을 퍼트릴 권리가 없을 텐데. 더군다나 그게 다른 이의 소환자라면…….”
“지금에 와서도 그런 고리타분한 규율을 따르는 건가. 예전의 네놈과는 다른데. 나는 저 인간에게 온갖 지식을 주고, 나름 잘 대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너보다는 말이야.”
“동시에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도록 꿈을 꿀 때마다 나타난 주제에.”
녹티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비엘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만큼 강한 압력에, 자비엘은 자연스럽게 기침을 했다.
“자, 잠깐……, 녹티스…….”
“이 녀석은 내 거야.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몸이라도 섞어줄 수 있으니까.”
“아니, 저는 동의하지 않았…….”
“아님 입이라도 맞추어 줘? 다시는 네가 눈독들이지 못하게.”
“그러니까 동의하지 않았다고…….”
두 악마의 기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것은 자비엘이었다. 그리고 두 악마는 여전히 자비엘의 말을 듣지 않고, 치졸한 싸움을 이어간다.
“성욕과 쾌락을 겨우 관장하는 주제에, 인간과 행위하더니 정이라도 든 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을 꾸역꾸역 인간에게 밀어 넣어서는 언젠가 잡아먹으려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것 아니야?”
“위계질서를 지켜라, 시트리.”
자비엘은 머리를 싸맸다. 악마라는 것들은 본래 이렇게 동족끼리 사이가 나쁜 건가?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즈음, 녹티스는 손을 뻗어 자비엘의 뺨을 잡고, 그대로 키스했다. 혀와 혀가 얽히고, 설마 정말로 입맞춤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자비엘의 숨결이 산소가 부족한 탓에 거칠어진다. 그리고는 약한 통증이 느껴지고, 이윽고 입을 뗀 녹티스로부터 혈액으로 추정되는 붉은 액체가 자비엘의 입까지 이어진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부에르는 사자의 형상을 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다시금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자비엘은, 녹티스가 나란히 누운 채로 옆에서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번에 확실히 말해두었으니, 아마도 그런 꿈은 더 이상 꾸지 않을 거야.”
그리고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녹티스에게, 자비엘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점차 떠오르는 꿈의 파편을 되짚어보다가, 제3자(비록 악마였지만)의 앞에서 키스(이쪽도 악마였지만)해버렸다는 사실에 수치스러워 탄식하며 돌아누워 버린 것이다. 終
2023.02.14
'Te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oiconism (0) | 2023.05.17 |
---|---|
악마의 룸메이트와 사탄의 베이비시터 (0) | 2023.05.17 |
박람회 (0) | 2023.05.17 |
악마와 흘레붙은 밤 (0) | 2023.05.17 |
CAR & DRESS (0) | 2023.05.17 |
Text의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