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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2023. 5. 17. 22:02w. 바냐엘(@_Basilpesto)
자비엘은 펄럭 소리를 내며 양팔만 한 길이의 거대한 안내도를 펼쳤다. 수정궁의 유리창을 통과한 초여름의 햇살이 지도 위에서 금빛 잉크로 녹아들었다. 그림자라고는 한 점도 없을 정도로 빛으로 가득 찬 전시관은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이색적인 풍경과 상품들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비엘이 지도에 적힌 전시품 이름을 하나하나 찬찬히 읽으며 걷는 동안, 초록색 깃털을 가진 까마귀는 떠들썩하게 입을 놀리며 그의 곁에서 푸드덕거리고 있었다.
"저것 봐, 자비! 이 정도의 기술 발전이라니, 엄청나네~ 이건 분명 다른 대륙에서 가져온 거겠지? 인간의 피 냄새가 굉장히 짙게 느껴지고 있어♥ 동족을 이렇게 잔혹하게 다루다니, 정말이지 인간들의 욕심은 상상 이상이라 악마인 나도 가끔 놀랄 정도라니까! 인류의 멸망이 2세기는 가속화된 게 보이는걸♥"
한껏 격앙된 목소리에 자비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녹티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역시 이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가진 욕망의 결정체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니. 악마 입장에서는 즐거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당신한테 터질 심장이 있긴 합니까?"
"이 주전자 좀 봐. 이렇게 큰 루비가 빙 돌아가며 붙어있는 꼴이라니. 완전 사치스럽고 마음에 들어♥"
녹티스는 이미 사방의 휘황찬란한 전시품에 시선이 팔려 자비엘의 잔소리 따위는 귀담아듣지도 않는 상태였다. 자비엘은 작게 한숨을 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햇살 가득한 온실에서 열리는 사치품 가득한 세계 최초의 박람회. 사치품과는 거리가 먼 자비엘이 이곳에 온 까닭은 녹티스 때문이었다. 며칠 전, 직장에서 자신의 박제 몇 개를 만국박람회라는 곳에 출품하겠다면서 대가로 자비엘의 손에 억지로 초대권을 쥐여주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보러 오는 박람회에 작품이 전시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니 꼭 보러 오라면서. 어쩔 수 없이 초대권을 받아든 자비엘은 집에 오자마자 그것을 찢어 휴지통에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날카로운 녹티스가 그것을 발견하고 몇 날 며칠을 박람회에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결국 그의 성화를 못 이긴 자비엘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애도 아니고 말이야…….'
워낙에 사치품에 학을 떼는 성격인 자비엘은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전시되어 있는지 잠깐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행한 녹색 까마귀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인간의 눈부신 발전에 호들갑을 떨며 눈을 빛내는 바람에 두 사람은 벌써 3시간째 박람회장을 돌고 있었다. 게다가 박람회장은 제대로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자비엘에게는 정말이지 최악의 장소였다.
"그렇게 졸라봤자, 제가 사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애초에 자비엘에게는 이곳에 전시된 사치품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있더라도 사치품에 돈을 쓰는 건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꺄악거리는 녹티스를 뒤로 한 채 전시대 모퉁이를 돌자 유독 키가 큰 식물이 심겨 있는 공간이 나왔다. 잎이 넓은 열대 식물들이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덕분에 그곳만 그늘이 져 있어 자비엘은 거대한 온실을 가득 메운 온기로부터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서늘한 녹음 밑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자비엘은 순간 멈춰 섰다.
자비엘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그의 손에서 탄생한 박제들이 서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건조하고 삭막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짜 식물 사이에 서 있는 박제들은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숨 쉬는 듯했다. 오색찬란한 날개를 가진 새들은 나무 사이를 고요히 날아다녔고, 사냥감을 노리는 이국의 포식자들은 발소리를 죽인 채 그림자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치 사후 세계에 발을 들인 듯 몽환적이었다. 적막에 잠긴 이곳은 모든 것이 숨 막히도록 반짝이는 박람회장에서 유일하게 자비엘이 편안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소란스럽던 귓가가 잠잠해지고 산란하던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자비엘은 눈을 감고 나뭇잎 사이에서 그에게 속삭이는 얕은 바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는 그렇게 조용히 짙푸르고 아늑한 그의 낙원 속에 잠겨 들고 있었다.
자비엘이 그만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사이, 녹티스는 박람회장을 구석구석 돌고 결국 안경알만 한 다이아몬드를 사고 영수증을 팔랑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비엘을 찾아 박제 전시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녹음 속에 묻힌 자비엘을 발견한 녹티스는 그의 이름을 불러 상념에서 건져 내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천장을 가진 푸른 잎 사이로 부서진 햇살 조각은 자비엘의 보랏빛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한쪽만 남은 자비엘의 녹주석 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훨씬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림자 아래 가만히 서 있는 자비엘의 모습은 마치 동굴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원석 같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 풍경을 바라보던 녹티스는 조용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공간에 전시된 자신의 박제를 감상하던 자비엘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너무 오래 감상에 빠져 있었다. 자비엘은 그제야 동행인의 행방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녹티스는 어디로 갔지? 이 넓은 전시장에서 그를 찾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곧 해가 질 테니 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허둥지둥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자비엘은 결국 누군가와 부딪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그런 그를 단단한 팔이 잡아 일으켜 세웠다. 사과를 위해 입술을 떼던 자비엘은 상대방의 눈을 보고 순식간에 눈살을 찌푸렸다. 싱글싱글 웃는 낯의 녹티스가 자신을 반쯤 껴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대체 어디 있었던 겁니까, 당신."
"후후……♥ 어디 있었기는, 내 컬렉션에 추가할 만한 보석이 있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녔지♥ 장인들의 오만함이 태양보다 더 번쩍번쩍 빛나고 있어서 고르기 어려웠지 뭐야……♥"
"그래서, 또 사치품을 사들인 겁니까?"
짜증이 묻어나는 자비엘의 잔소리를 칭얼거림으로 치부해버린 녹티스는 상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내 손에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있거든♥ 나 말고는 아무도 발견할 수 없는……그래서 환불하고 왔어♥"
"……결국, 사기는 했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거."
"응♥ 하지만 제대로 환불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자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자비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이 작자를 이런 곳에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수집욕이 강한 녹티스에게 이곳은 놀이동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하나만 샀었다니 그나마 다행인가. 자비엘은 녹티스의 품에서 벗어나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충분히 구경했으면 집에 돌아가기나 하죠."
"후후, 좋아. 오늘 데이트 정말 좋았어, 자기♥ "
"데이트는 무슨……!"
자비엘은 매서운 눈초리로 녹티스를 한 번 째려보고는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늘을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햇살이 그의 위로 내리쬐었다. 자비엘의 뒤를 따라 걷던 녹티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비엘 비넷은 단연 이 박람회에 전시된 그 어느 것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런 보화가 자신의 손에 있는데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자비―같이 가♥"
녹티스는 춤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비엘을 뒤쫓아갔다.
202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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