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악마의 룸메이트와 사탄의 베이비시터
2023. 5. 17. 22:13w. hakano(@ayakashiphobia)
hakano 님의 영화+글 커미션, 영화는 <사탄의 베이비시터> 입니다.
# More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피와 살점이 화려하게 튄다. 밤하늘에 비추어진 것은 목이 매달린 남자의 시체. 화재 현장에서 뼈도 추리지 못한 여자의 시체. 산탄총을 갈겨 터트린 머리통. 덫에 걸려 박살이 난 네일 아트. 그리고 제 옆에서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고 있는 악마까지. 자비엘은 머리를 싸맸다. 그러지 않아도 코믹스를 떠올리게 하는 익살스러운 팝업아트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자막과 등장인물들의 역시나 화려한 비명은 본래 시끄러운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자비엘에게는 지나치게 큰 부정적 자극이었다.
“그러니까, 희생자의 피라거나 그런 것 하등 쓸모없다니까. 자비도 알지? 왜, 나와 계약할 때도…….”
“……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당신이 B급 호러 영화의 설정에 쓸데없이 진지한 시비를 걸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너무해. 직업병 같은 거라고. 자비도 선혈이 낭자한 화면을 보면서도 익숙하니 별다른 불평을 내뱉지 않았잖아!”
푹 지친 듯한 자비엘의 목소리와 묘하게 들뜬 듯한 녹티스의 목소리가 섞인다. 관람 내내 녹티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록 동일 업계의 존재로서 틀려먹은 고증 따위를 쉽게 알아볼 수는 있었으나, 그와 별개로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야이기에 반가우면서도 즐겁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영화를 고른 것도 녹티스였고, 그 연유는 <사탄의 베이비시터>라는 제목에 ‘사탄’이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그것이었으니까. (자비엘은 ‘진짜 이걸 보자는 겁니까? 지금 제가 악마와 계약했다고 꼽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하며 끝까지 그의 선택을 말렸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자기의 베이비시터라고 할 수 있지?”
“어디 사는 베이비시터가 자신이 돌보는 아이를 섹슈얼한 시선으로 바라봅니까?”
“시대가 변했어, 자비. 게다가 자비는 성인이니까 그래도 문제될 것 없잖아.”
“당신은 애초에 베이비시터가 아니잖습니까.”
만담 같은 대화가 흘러간다. 그 흐름에 발맞추어, 녹티스는 다시금 문제적 발언을 꺼낸다.
“나도 네게 이런저런 짓을 당해도 좋은데.”
“하…….”
“응? 어떻게 생각해?”
문장을 채 끝맺기도 전에, 녹티스의 손에는 잘 갈아진 나이프가 들려 있다. 나이프의 날을 맨손으로 잡은 녹티스는, 칼의 손잡이를 자비엘에게 형한다.
“찔러 볼래? 왜, 머리에 칼이 두 개나 꽂힌 첫 번째 희생자처럼…….”
평소라면 녹티스가 또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하고 넘길 일이었으나, 소나기처럼 내리는 피와 훼손된 시체의 잔상으로 가득한 뇌로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게 되었다. 홀린 듯이 나이프를 잡고, 날을 바라본다. 지문 하나 없이 깨끗한 칼날은(녹티스가 그것을 쥐었음에도 특별한 흔적은 남지 않았던 것이다) 각도를 기울이면 녹티스의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 자비엘은 고민했다. 영화에서 나온 것은 시체와 혈액 뿐. 내장도, 토막난 사지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리얼한 영화면 곤란하겠지 싶으면서도, 미적지근하게 끝난 영화는 자비엘의 가학심을 쉽게도 자극했던 것이다. 자비엘의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나 나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움직임은 아니었다. 도파민이 마구 분비된, 살짝 정신을 놓은 머리로 드는 생각이라고는, 어디를 찔러야 효과적으로 피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도 새디스트의 그것.
그러나 침묵만이 내려앉을 뿐, 자비엘은 녹티스를 찌르지 않는다. 스스로가 인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가학심은 실낱같은 이성 앞에서 좀처럼 맥을 추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동시에 익숙하게도, 녹티스는 칼을 든 자비엘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시원스러운 동작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의 머리에 냅다 칼을 박아버렸다. 우드득, 하는 소리는 분명 두개골에 구멍이 뚫리는 소리다. 어쩌면 뇌까지도 휘저어졌을지도 모른다. 녹티스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내린 고통에도 여전히 능글맞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칼이 꽂힌 정수리 근처로부터 피가 흘러나와 홍채의 색이 다른 두 눈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자비엘은 녹티스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에 칼을 낚아채어 그로부터 흉기를 떼어 놓았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자비는, 이런 거 좋아하잖아? 어차피 인간의 몸이라는 게, 복구는 쉬워.”
좀처럼 맞물리지 않는 대화에 자비엘이 붉은(원래는 하얬다) 장갑을 벗어내면, 맨손에는 잔상처가 가득 드러난다. 그 손에 다시금 녹티스는 제 손을 얹는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칼을 쥐여주고, 이번에는 제 가슴을 향해 힘껏 날붙이를 박아넣는 것이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아, 자비는 모르는 거구나?”
흉계를 떠올리는 듯한 미소를 걸치며 녹티스는 제 가슴에 꽂힌 칼을 흘긋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비, 자기는 물론 박제사로서도 우수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인, 너를 설명할만한 말이 무엇인지 알아?”
“…….”
자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맨손에 튄 녹티스의 혈액을, 벗어뒀던 장갑에 대충 닦아낼 뿐이다. 정적이 찾아오고, 시간 제한이라도 끝난 것처럼 녹티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기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운 사람이야.”
“그런 헛소리는 그만…….”
“사실은 박제 같은 거,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시체를 다룰 수 있는 일이잖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비엘은 굳은 표정으로 한 걸음 녹티스에게서 물러섰다. 그러나 녹티스의 말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봐, 자비, 엄청나게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나를 몇 번이고 찌르고 있잖아.”
“…….”
자비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없었다. 유혈과 시체가 절반인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자비엘의 눈앞에서, 녹티스의 상처는 치유되어 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의 상처는 정상적으로 복구되었으나 가슴은 아까보다는 조금 더 큰 것 같은……, 아니, 꽤나 커진 것 같은…….
“그런 자기에게 특별 서비스. 이 정도면 극 중의 베이비시터와 비슷한 사이즈지?”
“방금까지 그 베이비시터가 사람을 죽이다가 자신도 죽어버리는 영화를 보지 않……, 윽.”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을 내뱉는 자비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녹티스는 가볍게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여성 특유의 말랑한 허벅지의 살결이 자비엘의 하복부에 닿고, 녹티스가 고개를 숙이면 이제 가슴골 사이에 자비엘의 얼굴이 파묻힌다.
“자, X. 나를 N이라고 불러 봐. X는 나보다 훨씬 어리니까, 베이비시터가 필요한 나이잖아?”
그러고는 쿡쿡 웃었다. 자비엘은 당황하여 상대의 몸을 밀어내려 했으나, 좀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갑자기 진행된 이 상황극은 결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아직 자비엘의 손에는 예의 핏자국이 멀쩡한 부분과 상처가 난 부분을 통틀어 낭자했던 것이다.
“N이라고 부르면 굿나잇 키스라도 해줄 수 있는데.”
“그만, 잠깐……, N, N…….”
결국 이긴 것은 녹티스 쪽이었다. 풍만한 유방 사이에서 숨이 막혀 자비엘은 그의 청을 듣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자비엘의 숨통을 트여주면, 그는 마구 기침을 하며 호흡을 정돈했다. 영화를 본 것은 킬링타임으로써 의미가 있었으나, 그런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문학 속의 주인공이 되다니, 그런 게……되고 싶겠습니까? 같은 뉘앙스로 사양하게 되는 것이다. 콜록임이 이어지며 자비엘은 녹티스를 바라보았다. 여성체로 몸을 바꾼 그는 정말로 <사탄의 베이비시터>의 B를 닮았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만, 자신이 C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가뜩이나 같이 지내는 나날은 무던하지도 않고 조용하지도 않다. 무엇을 떠올려도 제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자비엘은, 그런 말들은 모두 목구멍 아래로 숨기고는 그저 저벅저벅 걸어 욕실로 향할 뿐이다. 그의 피로 얼룩진 손을 씻고, 분명 망가진 꼴이 되었을 제 모습을 정돈하기 위해서.
“자비, 화장실 문 잠가 줄까?”
“……이 문, 안에서 잠그는 것이잖습니까.”
이후 들리는 웃음소리는 마치 할로윈의 어린아이 같았다. 자비엘도 끝내 조금은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열흘 중 아흐레 정도를 그에게 휘둘리고 있지만, 이런 식의 장난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자비엘은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정확히 10초 뒤, ‘혹시 자비, 내가 들어가서 네 욕정을 풀어주길 기다리는 거야?’라는 녹티스의 헛소리에 의해 휘발되었으나. 終
2023.04.13
'Tex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관의 시대 (0) | 2023.05.17 |
---|---|
stoiconism (0) | 2023.05.17 |
러브 코미디 ~악마도 질투를 느끼나요?~ (0) | 2023.05.17 |
박람회 (0) | 2023.05.17 |
악마와 흘레붙은 밤 (0) | 2023.05.17 |
Text의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