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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의 시대
2023. 5. 17. 22:40w. 체리골드(@cherry_gold0812)
스팀펑크+로판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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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낙관의 시대였다.
철도가 놓인 곳이면 어디든 힘차게 달려가는 증기기관차처럼 인류는 유사 이래 최고의 발전을 거듭했다. 기차는 고도의 훈련을 거듭한 말보다 빠르게 물자를 옮겼고, 비행선은 태양처럼 떠올라 인간의 위대한 성취를 뽐냈다. 기차가 옮긴 것은 물자뿐만이 아니었다. 몇 달이 걸려야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이 며칠 만에 만나 서로의 지식을 나누었다. 쌍이 있어야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지식도 맞물리자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곧 투박한 기계들이 점차 세밀한 모 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많은 톱니가 사용된 기계장치가 생겨났고 몇 번의 실패 끝에 인간은 기계장치를 다양한 곳에 적절하게 적용했다. 그 과정에서 홀로 움직이는 기계들이 생겨났다. 어느 것은 간단했고, 어떤 것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하고 섬세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로봇이라 불렀다.
그중에는 인체를 본떠서 만든 것도 있었다. 둥근 철제 헤드와 투박한 몸통에는 두 개의 팔과 다리가 붙어 움직였다. 그들은 주로 탐험가의 보조 역할로 사용되었다. 미지의 땅과 혹시 모를 맹수에 대비하기 위해 사람보다 크고,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그 안에 들어간 톱니만 수백 개에 이른다던가. 세밀하게 맞물린 톱니와 도르래는 힘찬 걸음을 만들었고, 철제 마디가 그대로 드러난 손을 인간처럼 움직이게 했다.
처음에 태엽 장치로 움직이던 것은 곧 실용성을 위해 태엽 대신 내연기관이 장착되었다. 그들은 곧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홀로 연기를 뿜으며 움직였다. 처음엔 석탄을 넣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입이나 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그걸 처음 본 사제 중 하나가 악마라며 까무러쳤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정교에서는 로봇, 특히 인간형 로봇의 존재를 껄끄러워했다. 노골적으로 두 발로 걷는 생명은 신의 권위로만 창조가 가능하다는 설교가 강단 곳곳에서 들렸다. 그러나 인류가 실체 모를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근원을 ‘진화’에서 찾고 있었고, 그건 오랫동안 그들을 억압한 신의 권속과는 상관없는 자연의 우연에 가까웠다.
신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 시대의 신앙을 믿지 않았다. 인간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위대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탐험가들은 새로운 동물과 ‘진화’의 증거를 찾기 위해 비행선을 타고 미지의 땅을 경쟁적으로 누볐다. 인간형 로봇은 그들을 따라 풀을 베고, 길을 만들었다. 때론 날아오는 창과 화살을 막아내며 탐험을 도왔다. 탐험가의 비행선에는 희귀한 동물과 식물, 화석이 넘쳐났다.
그뿐인가, 엘도라도 전설이 유행하면서 그들의 비행선엔 금화가 넘쳐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행선은 부와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태양도 가릴 만큼, 큰 비행선이 떠오른 날이면 사람들은 태양보다 비행선을 우러러보았다.
오랜만에 돌아왔다는 백작의 비행선도 딱 그랬다. 그가 돌아온 날, 비행선이 착륙할 때까지 런던 일부에 밤이 찾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에 관심 없는 자비엘의 귀까지 들어올 정도로 런던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귀환이었다. 자비엘은 집사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그 소문의 일부가 과장되었겠으나, 결코 거짓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백작의 방까지 이어지는 복도는 넓고 길었다. 그가 들어온 입구 가 비행선이 아니었다면 저택의 복도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저택을 옮겨왔다고 해도 믿겠는걸. 탐험을 떠나는 데 이렇게나 고풍스러운 복도가 필요한 거야? 인간이란 때로 악마보다도 탐욕스럽다니깐♡”
“녹티스, 여기 동행하기로 한 조건이 뭔지 잊으셨습니까?”
“응응, 알지. 입 다물고 있기. 맞지?”
녹티스의 목소리는 항상 과장되게 들떠있었고, 딱 타인의 귀에 박히기 좋은 음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앞만 보고 걷던 집사의 눈길이 뒤를 향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비엘은 녹티스가 보란 듯 입을 잠그는 흉내에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더 말해봤자, 속 시끄러운 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그럴 바엔 끓는 속을 숨 한 번으로 식히고, 침묵을 택하는 편이 나았다. 오랫동안, 정확히는 3년 반의 동거생활이 그에게 준 생활의 지혜였다.
멈췄던 집사의 걸음도 그에 맞춰 다시 앞으로 향했다. 짧고 가벼운 침묵 속, 세 사람은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문은 마호가니 목재에 고풍스러운 무늬가 양옆으로 새겨져 있었다. 별다른 소개 없이도 누구의 방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 용도라면 더할 나위 없는 모양새였다.
“루드빅 백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 뒤의 부름은 고풍스러운 조각틈 사이로 들려왔다. 한 박자 늦 게. 들어오게!
“그러니, 제게 맡기고 싶은 박제가 로봇의 박제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이번 탐험에서 가장 활약했는데, 아쉽게도 내연기관이 완전히 망가져서 더는 쓸 수 없다고 하더군. 나를 정말 오래 도와준 친구였거든. 그래서 그 죽음을 기리려 하오.”
박물관장의 오랜 지인이라는 백작은 그와 친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정해 보였다. 한 손에 꼭 쥐고 있는 지팡이를 제외한다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비엘은 작업물로 시선을 돌렸다. 곧 박제가 될 그것은 백작의 응접실 왼쪽 벽에 힘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응접실 외 창을 파고든 햇살이 그 위를 노랗게 가로질렀다. 몸통 위로 덧댄 가죽이 흑진주처럼 반짝였다. 흑표범 가죽이었다.
“보관은…”
“당연히 이곳에 할 것이오. 이 멋진 식물들과 동물 박제 사이에 세워두고 싶소. 박물관만큼은 아니지만, 꽤 멋진 전시 공간이 아니오?”
백작이 꼬나문 파이프에서 대답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희미해지는 연기 너머로 보이는 응접실은 그의 말처럼 다양한 식물과 동물박제가 조화롭게 놓여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의 열대우림 관을 작게 압축시킨 것 같았다. 폭이 넓고 긴 이파리가 햇빛을 받아 푸른 그림자를 만들고, 그 아래에 표범은 몸을 숙여 먹잇감을 노리고 있 었다. 의도한 것인지, 맞은 편의 작은 덤불 사이에는 화려한 날개를 펼친 공작새가 서 있었다. 두 동물의 눈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그 광택이 자비엘을 열대우림이 아닌 비행선으로 돌아오게 했다.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에 덧씌운 빛은 결코 살 아있는 것만큼 빛나지 못했다.
“예, 그렇게 보입니다.”
짧은 감상에 백작이 혀를 짧게 찼다. 열과 성 대신 돈을 쏟아부 은 공간에 대한 칭찬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그러나 자비엘은 그 이상의 감상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는 빠르게 작업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넘겼다.
“저는 기계박제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래도 제게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관장 말로는 당신보다 실력이 좋은 박제사는 영국 땅에 없을 거라던데. 기계박제도 가끔 의뢰가 들어오면 하지 않소?”
“저는 개인 의뢰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료가치가 충분한 로봇이 기증되면 가끔 박제할 뿐입니다.”
이 의뢰도 관장이 아니었다면 그의 명성과 상관없이 단칼에 거절 했을 것이다. 애당초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는 공무원 신분으로, 겸직이나 겸업이 금지되어있었다. 그러나 법이란 건, 대체로 약자에게 엄하고 강자에게 유했고 관장의 정신머리도 그랬다. 자비엘의 거절에 그는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낡은 법전을 가져와 자신이 확인했으니 괜찮다고 했다.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까웠다. 자비엘은 원리 원칙주의자였지만 그만큼 무던하고 조용히 살고 싶었다. 상사의 괴롭힘은 그가 원하는 삶을 여러모로 귀찮게 할 것이 자명했으므로, 자비엘은 쾨쾨한 법전의 문장을 모른척 믿어주기로 했다. 누구를 해치는 일도 아니었으니.
“하하, 그러면 선생의 개인 작업은 내가 처음이오?”
자비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짧은 감상에 불쾌하던 표정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거, 조수분까지 함께 와주고 영광이구려. 작업실은 응접실 바로 옆 칸에 마련해두었소. 편하게 작업해주시오. 그건 그렇고, 조수분이 정말 미남이구려. 어디 영화에라도 나오셨나?”
조수? 자비엘은 녹티스가 입을 열기 전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별안간 박제사의 조수가 된 녹티스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그를 따라나섰다. 짧은 말을 덧붙이고선.
“배우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살고 있긴 하죠♡”
인간의 탈을 쓰고 사는 건, 분명 배우의 삶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녹티스는 공간을 탐욕스레 채운 박제와 식물, 백작을 바라보았다가 등을 돌렸다.
“후후, 나 달링의 조수가 된 거야? 그렇다면, 이번에 나한테 보수의 일부를 나눠줘야겠는데♡”
“여기 오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었잖습니까. 외부인을 그냥 들여 보내 줄 리 없잖아요. 조수 핑계로 들어오게 해준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게 어떤가요.”
“네에네에, 알겠어. 고마워요, 자기♡ 난 여기서 조용히 로봇 해체 장면을 구경할게.”
어차피 그에게 재물이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녹티스는 입가를 잠그는 시늉을 하며 소파에 앉았다. 자비엘은 고요해진 공기 속에서 먼저 로봇을 둘러싼 가죽 외피를 벗겨내었다. 외투를 만들어도 될 만큼 질 좋은 흑표범 가죽이었다. 로봇에 외피를 씌우는 일은 뽐내기를 좋아하는 상류층에서도 꽤 드문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추위를 타지 않았다. 감각기관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도 백작은 귀한 가죽을 로봇의 외피에 둘러주었다. 추측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질 좋은 가죽이네. 자비, 그치? 이런 가죽은 직접 둘러도 아름다울 것 같은데 말야. 후후, 흑진주처럼 빛나잖아. 로봇에 쓰다니, 엄청난 사치야. 나만큼 사치스러운 인간일지도…♡”
“재력을 뽐내기 위해, 애완동물에게 귀한 걸 먹이거나 입히는 경우는 더러 있죠. 그치만 로봇은…….”
추측으로 희미해지는 말끝에 온전한 온점을 붙이는 것은 녹티스 였다.
“드문 일이다?”
“드문 일이긴 하죠. …친구처럼 아꼈다는 말은 아마 진심이었던 모양이네요.”
자비엘은 대답과 함께 기계를 꺼냈다. 평소 그의 작업실에서 보기 어려운 기계에 녹티스가 허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일정 두께의 철을 잘라내거나 이어붙일 수 있는 휴대용 용접기구였다. 동물과 달리 로봇의 외피는 훨씬 두껍고 단단했기에 특별한 기구가 필요했다. 모양새는 동물 사체를 가르는 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둥근 버튼을 누르면 칼날이 가열되어 철을 녹이는 원리였다. 손잡이 내부의 장치 때문에 손에 닿는 무게는 훨씬 묵직했다.
표범 가죽이 벗겨진 로봇의 상체가 뜨겁게 달궈진 칼끝에 천천히 열렸다. 개복된 상체에서 매캐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안쪽 내연기관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런 경우, 내부의 기관을 제거하지 않으면 외피까지 녹슬어 결국 토대 전체가 힘없이 무너졌다. 박제를 맡길 법도 하군. 자비엘은 신중하게 칼의 온도를 조절하며 안쪽 내부 기관을 감싼 얇은 두 번째 외피에 칼날을 대었다. 인간의 갈비뼈처럼 상체의 일부를 둥글게 감싼 외피가 갈라지자 정교한 기계의 세계가 자비엘을 반겼다.
“후후, 이거 꼭 인간의 몸 같은걸♡”
녹티스의 말대로였다. 갈비뼈 안쪽의 내연기관은 심장 모양이었고, 몸 전체로 이어지는 기계들은 불필요하게 꼬여지고, 뭉쳐져서 오장육부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오일이 샌 내부는 거멓게 번들거렸다. 그 빛 때문인지 안을 조직하는 기계들은 움직임이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울렁이는 장기처럼 보였다.
자비엘은 각 기관의 연결부위를 끊어내고 틈새에 천을 대었다. 그는 손을 넣어 연결이 느슨해진 아래부터 부품을 꺼냈다. 장갑에 오일이 묻어 동물의 장기를 꺼낼 때처럼 미끌거렸다. 익숙한 동시에 기묘한 기분이 가슴 어디선가 솟아올랐다. 차가운 부품인데도 인간의 장기를 꺼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비엘은 집중해서 부품을 마저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다.
어디선가 인간다운 로봇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순히 사람들 입을 거치는 소문인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이라면, 교회에서 이들을 꺼리는 이유도 이해는 갔다.
“있잖아, 자비. 아껴서 값비싼 가죽을 둘러 줄 정도면서 왜 장례식이 아니라 박제를 하는 걸까? 자기 입으로 친구라고 해놓곤 말이야.”
내연기관의 제거는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기에 자비엘은 그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곧 심장 모양의 기계가 그의 손으로 뚝, 떨어졌다. 녹티스는 드물게 재촉 없이,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비엘은 기계 표면의 검은 얼룩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검은 오일이 면포 가득 거멓게 스며들었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 분석적인 답변을 할 만큼 남에게 관심이 없습니다만.”
“후후, 그래도 인간으로서 대답해봐. 난 악마라서 잘 모르겠단 말 이야♡”
이 지겨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유희 거리에 불과하겠지만, 녹티스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작업 내내 그를 괴롭힐 게 뻔했다. 자비엘은 오일을 닦아내자 묘하게 붉은빛을 띠는 기계를 작업대에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친구라곤 했지만, 인간 대 인간관계가 아니니까요. 애완동물을 박제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자신이 추억하고 싶은 모습으로 영원히 고정하고 싶은 거겠죠.”
그들에게 박제는 사진첩의 사진과 비슷한 무게를 가질 것이다. 자비엘은 대답과 함께 천을 넓게 펴 오일이 묻은 내부를 닦아냈다.
“그럼, 왜 인간은 인간을 박제하지 않아? 사진보다는 그편이 더 오래 영원히 고정되잖아♡”
한 번도 악마라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지만, 이럴 때의 녹티스는 인간 외의 존재라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자비엘은 상식 밖의 질문에 그럴듯하게 대답하는 법은 잘 알지 못했다. 상식 외의 인간들은 스쳐 갈지언정, 그의 영역 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그래 가족은 제외하고.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족 역시, 스쳐 지나간 인간만큼이나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걸 만나고 말았지. 모서리까지 검게 젖은 면포가 무겁게 느껴졌다.
“인간은 인간을 박제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왜?”
“그게 사회통념이란 거고, 악마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지켜야 하는 사회적 선이라서요.”
“흐응, 전혀 이유가 안되는 걸. 인간 박제해보고 싶지 않아? 아니면, 살아있을 때 해부하는 건? 인간이든, 동물이든 말이야.”
새로운 면포로 안쪽의 기름을 마저 닦던 손길이 멈췄다. 갑자기 선을 넘어선 질문에 당황해서가 아니다. 자비엘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처리해야 할 몇 개의 업무가 남아있었고, 오늘 밤까지 읽기로 다짐한 책도 있었다.
“박제는 사체의 보존을 위해 하는 거예요. 난 애당초 살아있는 걸…….”
어떤 악취미를 가진 놈들은 몰라도, 자비엘은 항상 죽은 것을 오로지 학문적 목적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그건 욕망이 아닌 일이 었다. 그는 살아있는 걸 해부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삶이 아닌 죽음을 가르고, 조립할 뿐이었다. 이런 쓸모없는 입씨름에 작 업 시간이 지연되어 주말 시간을 낭비하다니.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작업을 이어갔다.
“이런 쓸데없는 걸로 입씨름 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은 정말 이상해. 지금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하면서, 신이라도 된 양 으스대는데 어떤 이유도 제대로 설명을 못하잖아♡”
자비엘은 이 유희에 더 이상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부 기계가 완벽히 제거된 로봇의 상체를 작업대 옆의 카트에 고정하며 대꾸했다. 반쯤은 비꼬는 말이었다.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인간이 정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었다면, 당신 같은 존재가 이 땅에 내려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 말에 녹티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쾌락은 비합리적인 것들의 총체였다. 그는 그 총체에서 태어났으며, 그 위에 군림하는 자였다.
“맞아, 그렇지만…….”
로봇의 상체를 일으키던 자비엘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녹티스의 얼굴이 어느덧 가까워져 있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우측 창에서 스며든 햇살이 그의 얼굴을 밝히는 동시에 어둡게 물들였다.
“자비는 스스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자비엘은 몸을 뒤로 물리며 대답했다.
“전 스스로를 그렇게 과대평가하지 않아요.”
녹티스의 손이 집요하게 그의 팔을 잡아채어 당겼다. 뿌리칠 수 없는 강한 힘에 자비엘의 상체가 녹티스에게로 기울었다. 시선이 오가는 거리가 아까보다 가까웠다. 숨소리뿐만 아니라 눈동자에 비치는 모습까지 보였다.
“후후, 내가 보기엔 그 생각이 네 욕망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걸♡”
“그런 것, 없습니다.”
의문이 자라날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대답이 칼 같았다. 불쌍하고도 재밌는 인간. 시트리는 단언하는 그의 얼굴이 무너질 날을 흔쾌히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고, 고대할수록 그 순간은 더욱 달콤할 테니. 그동안의 무료함은 다른 곳에서 적당히 채우기로 했다. 적당히 재밌고 불쌍한 인간이 널린 세상이었다.
“후후, 기다리고 있을게. 달링♡ 자기가 결국, 이 농담 같은 희망이 가득한 시대에서 진정한 자신을 만날 때까지 말야♡”
녹티스의 다른 손이 기계 내부에 미처 닦지 못한 기름을 문질렀다. 그와 동시에 자비엘은 강한 힘에 끌렸다. 말캉한 입술이 콧잔등에 닿고, 곧이어 따끔한 통증이 이어졌다. 콧잔등을 깨물고 떨어진 녹티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항상 그렇듯, 가볍고 의미가 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 위로 각기 다른 색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번뜩였다.
“난 이제 지겨우니까 집에 갈게, 집에서 봐. 자기♡”
그 눈은, 거울을 통해 항상 마주하는 익숙한 색의 연속인데도 다르게 빛났다. 문이 열리고,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질 때쯤 에서야 자비엘은 뺨이 질척하다는 걸 깨달았다. 손바닥엔 검은 오일이 묻어났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아래로 기운 햇살이 작업대 안쪽까지 깊게 파고들었다. 햇살을 받은 내부 기계들은 오일을 닦아냈음에도 번들거리며 빛났다.
자비엘은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이따금, 귀를 울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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