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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보 없는 폭풍에 대처하는 방법
2024. 3. 4. 08:56w. 관측자 (@0peraBlue)
오피셜 설정 기반
그날 하루도 녹티스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보통의' 하루였다. 해가 중천일 즈음에 적당히 일어나서 오후 동안 자비엘의 집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아 산책하면서 인간들의 생태를 구경하다가 귀찮게 구는 쭉정이를 손질했다. 자비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스름이 깔려 어둑어둑했다. 게다가 겉옷이며 셔츠에 피가 잔뜩 튀어 있는 사람에게 살갑게 말을 걸 정도로 정신 나간 이도 없었기에 녹티스는 쾌적한 귀갓길을 즐기며 돌아왔다. 차고에 자비엘의 애마가 얌전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녹티스는 밝은 표정으로 현관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자기~♡ 내가 보고 싶어서 일찍 온 거야?"
천장을 뚫을 듯이 높은 톤의 목소리가 자비엘의 귓전을 때렸다. 그러나 그는 녹티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의자에 반듯이 앉아 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녹티스는 무뚝뚝한 자비엘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자비엘이 척하고 내민 신문에 가로막혔다. 자비엘이 녹티스에게 내보인 것은 지역 신문 1면이었다. 「연쇄 살인 사건 또다시 발생!!」 대문짝만하게 실린 헤드라인의 내용이었다. 제목 밑에는 기사 내용을 짤막하게 요약해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사인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사건, 경찰 수색에 난행- 녹티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굳이 소리 내어 제목을 읽어보았다. 제목을 모두 읽고 나자 신문 너머로 차갑게 식은 자비엘의 시선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이것도 당신 짓입니까?"
마찬가지로 싸늘한 목소리로 자비엘이 물었다. 녹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뭐, 딱히 내가 저지른 짓이라고 하기에는 악마로서 살짝 거들어 준 정도인걸? 자신이 가진 악의에 솔직해질 수 있도록 말이야♡"
녹티스의 대답을 들은 자비엘은 푹 한숨을 내쉬더니 테이블 밑에 놓여 있던 신문을 들어 하나하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문을 모두 늘어놓으니 4인용 테이블을 모두 덮을 정도였다. 「흥분한 수말이 자신의 주인을 덮치다」, 「살인 사건 발생, 범인은 식인종?」, 「길거리에서 난교한 행인들 제압」 ……이외에도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기괴하고 자극적인 사건이 실린 기사들이었다. 자비엘이 없는 사이 녹티스가 심심풀이로 저질렀던 일들이 인간들이 쓰는 최신 문자로 가지런히 기고되어 있었다.
"그동안 당신이 저질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들입니다."
"안 그런 척하면서 나한테 엄청 신경 쓰고 있었구나? 감격스러운걸……♡"
"감격이고 자시고!"
날벼락처럼 들려온 고함에 녹티스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절대로 큰 소리를 낸 적 없는 자비엘이 처음으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아주 화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자비엘이 화내는 일은 정말로 드물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자비엘이 손으로 짚고 있던 신문을 구겼다.
"당신이 심심하다고 돌아다니면서 저지르는 일들, 제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 게 이 정도일 뿐이지. 최근에 이 동네에서 일어난 일들 모두 당신 짓이지 않습니까. 자동차 펑크는 기본이고 퇴근하고 왔더니 전혀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알몸으로 집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질 않나,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신호등 체계가 교란되질 않나, 새 떼가 일제히 건물 창문에 부딪혀 자살하지를 않나. 한두 번이면 적당히 참고 넘어가겠습니다만 이건……!"
"하지만 자비, 그 정도의 자극 정도는 있어야 인생이 즐겁잖아? 아무런 사건 없이 평이하게 지나가는 하루하루라니 생각만 해도 지루……."
무심하게 툭 내던져진 악마의 말은 결국 자비엘 비넷의 마지막 인내심마저 끊어버리고 말았다.
"됐고 어디 돌아다니면서 사고 치지 말고 집에서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다. 시트리!"
그렇게 자비엘의 불호령이 떨어진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지역 신문은 잠잠해졌고―기자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겠지만―일상도 평탄해졌다. 자비엘은 악마의 천성을 가진 녹티스를 믿지 못해 첫 일주일간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대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녹티스는 얌전히 자비엘의 집에 머물렀다. 퇴근한 자비엘이 집으로 돌아오면 녹티스는 그를 마중하러 미끄러지듯 걸어와 인사하며 포옹하는 것이 가장 요란스러운 행동이었다. 신체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자비엘이 그를 밀어내면 녹티스는 원래 그의 자리로 돌아가 독서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녹티스의 차분한 태도도 평화를 되찾은 일상도 모두 거짓말 같았으나 녹티스 때문에 잃어버렸던 고요한 일상을 되찾은 자비엘은 점점 이 기묘한 평안에 익숙해졌다. 녹티스를 향한 태도도 차차 누그러져서 퇴근한 자비엘을 그가 마중하러 나오면 가벼운 대화를 건네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습니까, 녹티스?"
"자비도 참. 집에 가만히 있으라면서 별일이 있겠어……? 창밖의 사람들 구경하고, 서재에 있는 책 읽고 그랬지."
"……제 말이라도 모두 따르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어찌 됐든 간에 자기는 내 계약자인걸? 내게 얌전히 있으라고 자기가 명령했잖아."
"원하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뭐, 계약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불만스러운 명령이라 해도 계약을 한 이상 악마는 따라야 하는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팔랑팔랑 걸어 제자리로 돌아간 녹티스는 자비엘이 따로 부르지 않는 이상 그를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악마인 녹티스의 존재감은 무시하기 어려웠지만 어쨌거나 그를 조우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에 자비엘은 마음이 놓였다. 어려서부터 손에 넣기 위해 안달했던 한 줌의 평화 속으로 돌아온 자비엘은 잔잔하고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주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야근 후 밤늦게 돌아온 자비엘은 집안에서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변화였지만 예민한 자비엘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들이 마치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흐릿하게 흔들리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심심하긴 했나 보군.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을 보니.'
녹티스의 장난치고는 매우 가벼운 축에 속하기에 자비엘은 그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자비엘은 그를 기다리다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잠든 녹티스를 깨워 상황의 해결을 부탁한 후 침실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이상 현상은 종종 일어났다. 일그러진 벽 사이로 소용돌이가 생긴다든가, 물건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엉뚱한 곳에 있다든지 하는 일은 예사였다. 이런 일을 벌일 범인은 명확했으므로 자비엘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녹티스에게 원상복구를 명령했다. 그러나 퇴근길 꽃집에서 사서 화병에 장식으로 꽂아뒀던 꽃이 하루 만에 사라진다든가, 스푼이나 나이프 같은 식기들이 하나씩 없어지는 일은 녹티스가 저질렀다기엔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이 들락거린다고 생각한 자비엘은 도둑을 현장에서 검거하기 위해 마침내 하루 휴가를 내고 집에 온종일 앉아 있게 되었다.
오전 중에 일어난 자비엘은 간단히 아침을 먹고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 척을 하고 있었다. 두어 시간쯤 지나 녹티스가 어슬렁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멍한 표정의 녹티스는 자비엘을 발견하지 못한 채 거실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녹티스의 모습에 자비엘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접시를 토스트처럼 우적거리고 있는 녹티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테이블 위에는 포크며 숟가락의 잔해처럼 보이는 것들이 떨어져 있었다. 자비엘은 저도 모르게 녹티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말았다.
"녹티스!"
그러자 녹티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자비엘은 후다닥 달려와 녹티스의 턱을 붙잡았다.
"지금 뭘 먹고 있는 겁니까? 당장 뱉어요!"
그러자 녹티스는 순순히 입을 벌려 입안에 있던 것들을 뱉어냈다. 사람의 입안에서는 날 수 없는, 사금파리와 금속 조각들이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식기들을 녹티스가 테이블 위에 뱉어내고 나자 자비엘은 그의 고개를 자기에게로 돌려 입안을 살폈다. 다행히 악마의 입안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자비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아직도 멍한 표정의 녹티스에게 말했다.
"하……. 차라리 도둑이 든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녹티스! 배가 고프면 말을 해도 됐잖습니까?"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녹티스가 고양이처럼 자비엘의 품에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자기, 오늘은 출근 안 했구나? 몰랐네……. 나한테는 인간의 음식이나 물건이나 별반 차이 없으니까 상관없는걸……♡"
그러면서 녹티스는 한참을 그의 품에서 부비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월의 연한 들풀같이 하늘거리는 속눈썹 아래서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자비엘의 모습이 비쳤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내가 자기를 독차지할 수 있는 걸까나♡?"
기대 가득한 목소리에 자비엘은 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있던 녹티스를 밀어내 의자에 제대로 앉히고는 말했다.
"어차피 계획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죠. 점심 먹고 함께 산책이라도 갑시다. 식사는 제가 차릴 테니 가만히 앉아 있으세요."
"알겠어, 자비♡"
녹티스는 오랜만의 관심이 기꺼웠는지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앉은 채 부지런히 그의 뒤처리와 식사 준비를 하는 자비엘을 미소 지은 채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고,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동네를 산책하다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 사건 이후로 식기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기에 녹티스의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평화가 계속되던 어느 날, 자비엘은 3일 정도 출장으로 집을 비우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녹티스를 빈집에 혼자 둬야 한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그를 걱정하던 자비엘은 곧 최근 그의 동태가 얌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열차에 올랐다. 그동안 별일 없었으니 괜찮겠지. 동물도 아니고 엄연히 지성이 있는 생물인데……. 그의 머릿속을 채웠던 짧은 기우는 차창 너머로 비치는 도시의 풍경과 함께 멀어져 버렸다.
출장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자비엘은 복귀 예정이었던 날보다 이틀이나 늦게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첫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 자비엘은 피곤함에 절은 얼굴로 문고리를 돌렸다. 현관으로 들어선 후 고개를 돌린 자비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강도라도 든 것처럼 집안의 온갖 가구와 장식품들이 엉망진창으로 내팽개쳐진 채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개중에는 짐승에게 뜯어먹힌 것처럼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들도 있었다. 쿠션은 마구잡이로 뜯긴 채로 솜털을 뿜어내고 있었고, 무엇의 잔해인지도 알 수 없는 쇳조각들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딱 봐도 녹티스의 짓이었다. 집안 꼴을 보자 올라오는 현기증에 자비엘은 문가에 기대 머리를 짚었다. 겨우 일을 끝내고 돌아왔더니 맞이하는 게 이런 난장판이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비엘은 손에 얼굴을 묻고 심호흡을 한 후 녹티스의 이름을 불렀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녹티스, 어디 있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집안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가출까지 한 건가? 마음이 다급해진 자비엘은 녹티스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극에 달한 초조함이 가슴을 움켜쥐는 기분이었다. 최악의 경우, 온 동네를 들쑤셔야 한다……. 녹티스를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 전, 자비엘은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커튼 한 구석이 부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온 것이 눈에 밟혔다. 자비엘은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가 커튼을 홱 열어젖혔다. 녹티스는 그곳에 있었다. 그는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며 창가에 기대앉아 있었다. 자비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건지 미동도 않은 채였다. 한숨과 함께 차마 갈무리하지 못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도대체 이게 다 뭡니까?"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녹티스의 시선이 자비엘을 향했다. 높은 텐션으로 쉬지 않고 재잘대던 평소와 달리 새벽 어스름에 잠긴 채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녹티스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자비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녹티스의 동공에 담긴 심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부로 마주해서는 안 되는,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의 공허가 자비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녹티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이 만화경 내부처럼 일그러지며 탈피하듯 본래 그가 지니고 있던 날개와 뿔 같은 요소들이 튀어나왔다. 그의 본모습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인 공포에 저절로 등 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대로 계속 뒀다가는 분명 지금보다 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하리라는 것만은 자명했다. 자비엘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허벅지 위에 놓인 녹티스의 손을 붙잡았다.
"……자비엘?"
이제야 자비엘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녹티스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힘없고 느릿한 목소리였다. 기약 없이 돌아오지 않는 그를 계속 기다린 걸까. 그것도 자신의 명령을 지키려고 집안에서만 머물면서.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지루한 일이었을 터였다.
"밖에서 바람 쐬면서 이야기 좀 하시죠."
그렇게 말하며 자비엘은 녹티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녹티스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녹티스와 함께 현관을 나선 자비엘은 곧장 차고로 향했다. 차고에서는 자비엘의 애마가 묵묵히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비엘은 먼저 녹티스를 조수석에 태운 후 자신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는 미끄러지듯이 안개 속에 잠긴 도로로 향했다.
늦가을의 새벽하늘은 태양이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아직 밤하늘의 어둠으로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살짝 내려간 차창 사이로 서늘한 아침 바람이 새어 들어와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걸까. 집을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는데. 자비엘은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어느 날, 그가 녹티스에게 비수처럼 내던졌던 한 마디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디 돌아다니면서 사고 치지 말고 집에서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다. 시트리!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것을 명령으로 인식한 녹티스는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데도 계약자인 자비엘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었다. 자유분방한 천성을 억누르고 자비엘의 무관심을 버텨내려다 결국 본능적인 반동이 튀어나온 것이겠지. 집을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힌다든가, 식기를 씹어먹는다든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악마인 주제에 충성스러운 반려견처럼 굴다니. 너무나 바보 같았고……이해할 수 없었다. 자비엘은 안경 너머로 녹티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초원의 들풀처럼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연둣빛 머리카락 사이로 녹티스의 얼굴이 보였다. 집에 갇혀 있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자비엘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녹티……시트리."
"……응?"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바람 소리에 묻혀 들을 수 없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대답으로 들려왔다. 자비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명령'을 내릴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당신을 구속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제가 했던 말은 부탁일 뿐이었어요."
"……."
녹티스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운전을 위해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관자놀이가 따가운 게 느껴졌다.
"그저……당신이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혼란과 범죄에 해당하는 일들을 벌이고, 그로 인해 저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가 오는 행동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했던 말입니다. 녹티스, 당신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즐기시지만……악마인 당신의 의도를 인간인 제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비상식적인 일이겠죠."
태양이 하늘을 맑은 보랏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고 있었다. 어둠에 잠겨 그림자처럼만 보이던 바다도 햇빛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머리를 따스하게 쓰다듬는 아침 햇살을 느끼며 녹티스는 자비엘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예전에 소환되었을 때, 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당신에게 특별하게 원하는 것도, 자유분방한 당신을 잡아둘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 피해가 오지 않는 한에서, 적당한 선만 지키시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지내셔도 됩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당신이 사고를 치지 않는 거겠지만……그래도 당신 또한 지성이 있는 존재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자비엘은 여전히 전면 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기에 그를 바라보는 녹티스의 표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비엘의 말이 끝날 때까지 녹티스는 눈웃음 지은 채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주절거리는 자비엘의 모습은 퍽 귀여웠다.
녹티스는 자비엘이 어떤 명령을 내리든 상관없었다. 두 사람을 묶는 것은 계약이었고 계약의 하위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악마의 일이었다. 이전의 계약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든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녹티스를 도구처럼 활용해 바닥이 뻔히 보이는 천박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런 인간들은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자비엘이 다른 이들처럼 대했다 해도 녹티스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을 터였다. 그러나 자비엘은 악마인 자신을 인간처럼 대했다. 그것이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었다. 그는 녹티스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녹티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더니 그는 자비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자비엘이 핸들을 꺾었다. 타이어가 마찰음을 내면서 차체가 양옆으로 흔들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찾았다. 그때까지도 녹티스는 자비엘을 껴안고 있었다. 거기다가 볼을 부비적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자비엘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녹티스에게 물었다.
"제가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겁니까? 정말로 큰일 날 뻔했잖아요!"
그러자 한껏 아양 떠는 목소리로 녹티스가 대답했다.
"미안, 자기가 한 말이 너~무 감동이어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별로 대단한 말도 아니었습니다만……. 충동이 해소되셨다면 이제 놓아주시죠. 운전에 집중하기 힘듭니다……."
자비엘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에 녹티스는 그의 목을 놓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창을 내리고 산뜻한 아침 바람을 만끽하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소금기가 담긴 맑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수평선만 보이던 바다가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런데 자비, 우리 어디 가고 있는 거야?"
"답답하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 주로 찾는 해변이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서요."
"자기의 비밀 아지트라는 거네. 기대되는걸……♡"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앞으로 아침 햇살을 맞아 윤슬이 부서지는 바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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