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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헤매는 숲
2024. 3. 19. 23:30w. 관측자 (@0peraBlue)
자비엘은 자신이 근무하는 박물관의 열대 온실 가운데 서 있었다. 열대 지방에 자생하는 식물을 옮겨와 섬세한 온도와 습도 조절로 박물관 안에서 뭇 연인들과 가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장소였다. 연인들은 우산같이 넓디넓은 나뭇잎 아래에서 밀어를 나누는 것을 즐겼고,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은 식물 사이에 교묘하게 장식된 곤충 박제를 찾아내고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제에 맞게 항상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푸르스름한 박명에 잠긴 온실은 고요했고 천장까지 자라난 식물들의 호흡으로 생성된 옅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깨어 있는 것은 오로지 자비엘 뿐이었다.
자비엘 자신 또한 이 공간을 썩 좋아하는 편이었으므로 그에게만 허락된 행운과 같은 적막 속에서 거대한 열대 식물 사이를 유유자적 거닐었다. 자신 이외에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온실이란 기묘하고 신비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평소라면 온실을 훑듯이 둘러보고 빠져나가기에 급급했을 테지만 지금 온실에 있는 사람은 그 한 명 뿐이었기에 여유를 부리며 보통의 그라면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았을 설명 팻말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인도보리수 아래 선 자비엘은 이파리의 모양새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특별히 관심 있어서라기보다는 직업병 같은 관찰 본능의 발현이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날개를 가진 제비나비였다. 자비엘은 나비를 조용히 바라보며 곤충을 전문으로 박제하는 그의 동료가 보았더라면 좋아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그의 눈앞에서 앉아 있던 나비는 포르르 날아올랐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도 나비를 좇아 움직였다. 나비가 날아간 곳에는 또 다른 온실의 입구가 있었다. 살짝 열린 유리문 너머로 정갈히 정리된 꽃밭이 보였다. 이런 공간이 박물관에 있었던가? 기억에는 없는 장소였다. 자비엘은 저도 모르게 새로운 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온실의 유리문을 열자 장미, 튤립, 개양귀비, 해바라기 등과 같이 익숙한 꽃과 처음 보는 꽃들이 어우러진 채 활짝 피어난 광경이 펼쳐졌다. 색색깔의 나비가 꽃잎으로 이루어진 각자의 침대 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보다 날개에 핀이 꽂힌 채 유리 상자 안에 박제된 것을 보는 일이 더 잦았던 자비엘에게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인간이 지나가는데도 얌전히 앉아 있는 나비들의 모습을 둘러보던 자비엘의 시선을 무언가 잡아 끌었다. 시들어 있는 장미였다. 생명력이 가득한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시든 꽃 한 송이쯤이야 꺾는다 해도 아무도 모르겠지. 자비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든 장미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의 손길이 닿자 시간이 되돌아가기도 한 듯 시들어 있던 장미가 고개를 들더니 본래의 강렬한 빛깔을 되찾고 싱그럽게 피어났다. 비현실적인 현상에 놀란 자비엘은 급하게 손을 거두다가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손가락에서 방울져 새어 나온 피가 장미밭 위로 떨어져 사라졌다. 달리 손가락에 두를 천 조각이 없었던 그는 다른 손으로 다친 손가락을 쥐고 있었다. 그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손 위에 앉았다. 은은하게 초록빛이 감도는 점박무늬 날개를 가진 나비였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어디로 사라졌나 한참을 찾았는데 이런 곳에 있었다니. 정말이지 자기와 있으면 지루할 날이 없다니까……♡"
자비엘이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누군가가 자신의 다친 손을 잡아끌었다.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녹티스가 그의 다친 손가락 위에 입 맞춘 채 서 있었다. 단순히 입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당황한 자비엘은 황급히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녹티스가 숙인 상체를 바로 세웠다.
"찾고 있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녹티스."
"말 그대로야. 분명 자기가 자는 걸 봤는데 기척이 사라져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그런데 이곳에 있을 줄이야……♡"
그렇게 말하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녹티스를 자비엘은 질린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저의 꿈속이고, 당신은 제 꿈속으로 마음대로 비집고 들어왔단 말입니까?"
"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네."
"정말이지 당신의 변태적인 취미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요."
자비엘의 차가운 발언에도 녹티스는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그의 미소에서 석연찮은 점을 느낀 자비엘이 물었다.
"아뇨……. 제가 맞는 말을 했다면 당신은 이것보다 더 극적인 반응을 보여줬을 겁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그런 애매한 반응이 아니라. 제 대답이 빗나갔군요."
녹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웃음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와 함께 돌풍이 불어오며 검은 나비 떼가 두 사람 주변을 에워쌌다. 마치 황야의 시체 주변을 활공하는 까마귀 떼처럼 나비들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날아다니면서 자비엘의 시야를 뒤덮었다. 녹티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웃음소리만 계속 들려올 뿐이었다. 나비가 안경에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자비엘은 안경 앞으로 팔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소리쳤다.
"몹쓸 장난은 여기서 그만두고 이제 저를 깨워주시죠. 녹티스!“
자비엘은 헉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깨어났다. 아직 한밤중인지 그의 방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방에는 자비엘 혼자였다. 그냥 악몽이었던 것뿐인가……. 자비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낮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녹티스임이 분명했다.
"……들어오십시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자비엘이 대답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방 안으로 들어와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비엘은 눈을 감은 채 상대방에게 물었다.
"이제는 꿈속에서도 저를 괴롭히기로 한 겁니까."
그러자 대답이 들려왔다.
"사랑스러운 나의 자비, 오히려 그 반대야. 길을 잃은 자기가 나의 박물관에 찾아온 거야."
"……당신의 박물관이라뇨."
그렇게 물으며 일어나려는 자비엘의 눈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잠이 몰려왔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녹티스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아직은……열어줄 수 없어……진실을 보고……부서지는 건……않으니까……."
그리고 자비엘은 꿈도 없는 깊은 잠에 잠겨 들었다.
2024.03.17
# 마지막 부분에 대해
마지막 부분이 어떤 설정으로 작업하신 것인지 설정이 궁금하여 작업자님께 여쭤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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