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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달로스의 암소
2024. 9. 23. 09:03w. 에르모(@NnicknameO)
해당 글의 배경 설정은 하나의 분기점 설정에 있는 것으로, 이하의 IF설정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 자비엘과 시트리(녹티스) 사이에 일방적으로 통보된 3년이라는 계약 기간의 끝이 다가왔으나, 시트리에게 요구하고 싶은 소원 따위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던 자비엘은 몇 개월 전부터 변수를 줄이기 위한 주변 신변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기엔 시트리는 워낙 변덕스러운 악마였고, 자비엘 역시 자신의 가족들이 그랬듯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준비하여 상황을 컨트롤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트리는 자비엘을 먹지 않고,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게 된 뒤에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해당 글의 자비엘은 직장을 그만 둔 상태입니다.
다이달로스의 암소
Cow of Daedalus
“Mr.비넷은 어서 나와 서신을 받으시오-!”
쾅쾅쾅, 저택 대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누군가 큰 소리로 고함쳤다, 거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투의 주인공을 창문 너머로 확인한 자비엘은 한숨을 내뱉었다.
사용인의 상징인 흰 가발을 쓴 남자는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제복을 입고 있었다.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옷은 퍽 강박적으로 여겨졌다. 그는 한 손으로는 은쟁반을 들고, 다른 손으론 계속 문을 두들겼다.
“Mr.비넷! 안에 계시오?”
높으신 분을 모시면 자신도 높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어디서 왔는지 소개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하대하는 이를 보고 자비엘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쯧-. 귀찮은 예감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자비엘이 위층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가자, 그곳에는 이미 여성체의 모습으로 메이드 복을 입은 시트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도 될까요? 주.인.님?”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시트리를 보며 자비엘은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까 들어가 있어요. 이제 와 사용인이 문을 여는 것도 이상합니다.
“제가 모실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다니까…. 자비엘이 말렸으나 시트리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고리를 잡았다. 활짝 문을 열고 ‘어서 오세요♡ 주인님을 찾아오셨나요?’ 하고 묻자, 심부름꾼은 늦었다며 버럭 화를 냈다. 자신보다 못한 메이드니까 당당하다는 거겠지.
“제가 자비엘 비넷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어머나♡ 놀란 것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뒤로 숨는 시트리를 무시하고 자비엘이 나섰다.
“Mr.비넷 씨! 댁에 계셨군요. 받으시죠. 제임스 로드릭 경이 보내신 겁니다.”
“제임스 로드릭 경이요?”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인 건 알지만,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평생을 가도 만날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자비엘은 혹시 당신이 벌인 일인가요? 하고 시트리를 돌아봤으나 여전히 가련한 메이드를 연기하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물 닦는 시늉을 하는 중이었다.
“로드릭 후작님 말씀입니다! 설마 모르신다곤 하지 않으시겠죠?”
마치 모욕당했다는 듯 미간을 구긴 남자가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다고 했다간 결투 신청이라도 하겠군. 자기가 그 대단하신 로드릭 경 본인도 아니면서? 자비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단지 왜 그런 분이 저에게 연락하셨는지가 의문이었습니다.”
편지를 힐끔 보자 정확하게 자비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번에 로드릭 경께서 사냥대회를 여시는데, 그곳에 초대한다는 초대장입니다.”
상상도 못 한 주제였다. 귀족끼리 모여 가둬둔 연약한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시시덕거리는 사교모임 아니었나?
“자세한 사항은 편지를 읽어보시죠. 가능하다면 답을 바로 돌려주셨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우선 읽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심부름꾼이 고개를 끄덕였고, 자비엘은 편지에 눈을 돌렸다.
Mr.비넷 군에게.
내 생각에 자네가 내게 편지를 받으면 꽤 놀랄 것 같다고 생각하네만, 내겐 비넷 군이 무척 친근하다네. 난 그대의 오래된 팬이거든. 종종 박물관 후원을 하러 가서 자네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근래의 소소한 취미였네만….
일을 그만두었다지? 소식을 듣고 퍽 상심했었어. 뭐 다르게 생각하니 그 덕분에 이번 일에 자네를 초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좋은 일처럼 느껴지더군!
곧 비밀리에 사냥 대회를 하나 열 생각이야. 그곳에서 자네를 박제사로 고용하고 싶네.
충분히 고민해 보고 답을 주게나. 자네에게 분명 특별한 경험이 될 게야! 그 훌륭한 실력을 썩히지 말고 나를 도와주게나.
그럼,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지.
-그대의 열렬한 팬. 제임스 R 로드릭. -
충분히 고민해 보고 답을 달라고 하면서, 곧장 답장을 가져오라 명했다니. 자신의 부탁을 자비엘이 거부할 수 없을 거란 자신이 느껴졌다. 초대장이 아니라 협박장이로군. 고민할 시간을 줘봤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초대에 감사히 응하죠.”
답장을 쓸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심부름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녹티스. 손님을 응접실로 모시게.”
“네♡”
자, 이쪽으로 오세요♡ 메이드 놀이에 빠져있는 것 같으니까 맡겨도 괜찮겠지. 자비엘은 서재로 향했다.
로드릭 경. 초대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에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자비엘이 짧게 쓴 답을 심부름꾼에게 건네자, 그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비엘이 시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시트리는 남자가 나가자마자 본래의 모습-평소에 주로 하는 남성체의 형상-으로 변했다.
“난 그냥 차를 줬을 뿐이야? 특별히 정성을 담은 특별한 차를 내줬다고♡”
“독 같은 걸 탔다고 하진 말아주세요. 귀족과 엮기면 곤란합니다.”
“이미 귀족과 엮인 건 자비 쪽인걸?”
편지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어도 시트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자비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박제 일을 하는 건 괜찮습니다. 특별한 경험이라고 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요….”
자비엘은 귀족들만의 놀이를 경험하는 걸 특별하다고 표현했기를 바라며 대답했다.
후작 측에서 마차를 준비해 줬기에 자비엘은 사냥터까지 고급 마차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맞은 편엔 히죽히죽 웃는 시트리와 이 초대가 썩 달갑지 않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사냥대회는 짧으면 한 달, 길면 두 달도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장소를 숨겨놓을 필요가 있을까? 일주일을 걸쳐 도착한 사냥터는 누구의 영지인지도, 북쪽인지도 남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중간중간 묵은 호텔 종업원들의 말투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사투리가 섞여 있는 걸로 멀리 왔다는 걸 짐작할 뿐이었다.
“녹티스, 여기가 어딘지 아나요?”
“북서부♡ 자세한 건 자비가 내게 키스하면 알려줄게.♡”
얼굴을 들이미는 시트리의 얼굴을 밀어내며 자비엘은 마차에서 내렸다. 분명 아직 여름이 채 가시지 않은 가을 초입일 텐데, 땅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사냥하러 왔으면서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오다니. ‘박제’를 위해서 서늘한 곳으로 고른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주인 어르신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님께 바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짐은 방으로 옮겨 놓겠습니다.”
마중 나온 하인이 짐을 수레에 실으며 물었다. 자비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구가 들었으니 조심히 다뤄달라고 덧붙였다.
“혹시 도구 가방이 따로 있으시면 그것만 작업실로 보낼까요?”
“작업실이 준비되어 있나요? 그럼, 이 갈색 짐가방만 부탁드리죠.”
보통의 귀족 저택에 박제실이 따로 존재하진 않을 텐데…. 미리 있었어도, 이번에 특별히 만든 것이어도 이상한 일이라고 자비엘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시트리가 귀에 ‘오히려 좋은 일 아니야?’라고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저택 안으로 안내받자마자 현관홀부터 가득 메워진 박제 작품을 보고 자비엘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전부 수준급의 박제사가 만든 작품으로 보였다. 벽면에는 희귀한 곤충 표본을 비롯한, 다른 저택이라면 조각상이나 동양의 도자기가 서 있을 공간에 전부 박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제사를 직접 사냥터까지 끌고 올 이유는 여간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없을 거로 생각했던 그였지만 이 모습과, 작업실까지 미리 준비해 준 성의에 혹시 정말로 ‘박제’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고 일순 생각했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로드릭 후작을 만나자마자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자비엘은 알 수 있었다. 시트리가 무어라 속 긁는 소리를 하는 듯 해서 뒤를 힐끔 돌아봤지만, 그는 싱긋 웃으며 결백을 주장할 뿐이었다.
“어서 오게나!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쁘군!”
제일 상석에 앉아서 시가를 피우던 남성이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미리 보고를 받은 건지 소개를 듣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와 자비엘을 덥석 끌어안았다. 순간 가까이한 후작에게선 묵은 시가 냄새가 불쾌하게 풍겼다.
“제일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어! 자네가 곧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커를 마저 칠 수가 있어야지! 다른 손님들을 버리고 여기서 한참 동안 기다렸네!”
허락도 받지 않고 자비엘의 손을 잡은 후작이 경망스럽게 손을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위쪽 앞니에 크게 박힌 금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는 역사 깊은 귀족 가문의 수장이 아니라 경망스러운 졸부처럼 보였다.
“자비엘 비넷 군! 이렇게 보니 훤칠한 청년이구먼!”
자비엘이 말도 꺼낼 틈도 없이 혼자서, 얼마나 자신이 그를 기다렸는지, 그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해내던 그는 한참 뒤에야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이쪽으로 오게나. 그리고 그제야 자비엘 뒤에 있는 시트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인이 분명 그의 조수도 함께 왔다며 보고했으나 새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저 청년은 누구신가?”
시트리를 쭉 훑어보며 그가 얼마나 영향이 있는 사람인지 가늠하는 듯 보였다.
“제 조수인 녹티스입니다.”
“안녕하세요, 후작님♡”
녹티스가 인사했으나 ‘조수’라는 소개에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했는지 후작은 대답 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행태에 시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자비엘이 헛기침했다.
“작업하는 데 꼭 필요한 친구라 허락 없이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비넷 군이 원한다면 무조건 데려와야지. 자네를 위해선 모든 편의를 봐주겠다고 미리 말하지 않았나! 음. 녹티스 군이라고 했나? 반갑군. 박제 일을 하는 청년들은 모두 훤칠하구먼.”
수잔! 차를 내오게! 후작이 종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행동 하나하나에 가벼움이 뚝뚝 묻어났다. 자비엘은 머리가 살짝 아파지는 것 같았으나 꾹 참고 표정 관리를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칭찬을 덧붙였다.
“로드릭 경, 저택에 훌륭한 작품이 많더군요.”
“오! 역시 비넷 군! 알아본 게인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애장품들이지. 하루라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이번에 운송하신 것들이라고요? 이동 중에 날이 안 좋아지면 박제가 상할 텐데요.”
비를 맞으면 썩을 수도 있고 온도 변화가 심하면 가죽에 어떤 손상이 갈지 뻔한 일이었다.
“에이,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나. 그럼, 새로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후작을 보며 자비엘에게 확실한 두통이 찾아왔다. 뭐라는 거지. 하루도 떨어질 수 없는 애장품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 사람…. 아득함이 느껴질 정도의 모순이었다.
그런 자비엘의 생각은 전혀 모른 채로 후작은 자비엘과 시트리를 상대로 오랫동안 박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쏟아냈다. 중간중간 하녀가 차를 세 번이나 더 가져올 정도의 긴 시간이었다.
“난 박제를 정말 좋아한다네. 이미 죽은 생명이 여전히 반짝이며 빛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자비엘은 자체적으로 중략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재창조된 생명력에 감동을 얻는다네!”
이 사람…. 질린다. 자비엘의 손이 살짝 경련하듯 흔들렸다.
후작은 직접 두 사람을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 아랫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아니 시켰으면 좋겠는데. 그는 굳이 복도에 놓인 박제를 설명까지 해주면서 친절하게 굴었다. 이 수많은 물건을 겨우 한두 달 전시하려고 옮기다니.
“자비랑 정말~ 잘 맞는 친구인 것 같아서 안심했어♡ 이번에 여행하는 동안 둘이 친하게 지낼 수 있겠네♡ 이렇게 박제를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하다니!”
대놓고 자비엘의 속을 긁으려고 시트리가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먼저 걸어가는 후작 몰래 속닥거리는 모습이 얄미웠다.
“자비가 조금 싫어하는 타입일지도 모르겠지만, 취미가 맞는다는 건 인간의 사회생활에 엄청 중요한 요소잖아♡”
“로드릭 경은 감히 친구라고 부를만한 위치의 분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삼가시죠.”
불쾌합니다. 이번엔 자비엘이 시트리에게 속삭였다.
후작이 시트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시트리의 방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자비엘의 옆방을 배정받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자비엘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는 박제가 없네? 자비, 아쉬워?”
“당신 방은 여길 나가서 바로 왼쪽이에요.”
“왜? 단둘이 밤을 지새우자고♡”
안타깝게도 저는 저녁 식사 후에 후작이 작업실을 소개해 주기로 해서요. 녹티스, 방에서 혼자 얌전히 지낼 수 있지요? 짐 가방이 제대로 왔는지 살펴보며 자비엘이 대답했다.
“난 우리 자기의 조수니까 그때도 함께해야지 무슨 소리야? 혼자서는 너무 외로워♡”
“얌전히 있어 주세요. 부탁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말 잘 듣고 있지 않아? 자기는 오히려 날 칭찬해 줘야 해.”
저녁 식사 시간에는 다행히 다른 초대 손님도 있어, 후작의 경박한 태도를 봐야 하는 건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자비엘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길게 늘어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제일 구석에 앉혀놓고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자비엘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도란도란 귀족들의 거만한 대화를 들으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시트리만이 음식에 담긴 정성이 맛이 없다고 기계처럼 구워 나온 스테이크라며 칭얼거릴 뿐이었다.
후작이 자비엘 앞에 다시 나타난 건 늦은 밤이었다. 모습을 보이지 않아 약속을 잊은 줄 알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려던 자비엘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후작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식사 후 술을 마시느라 늦은 건지 후작은 말도 어눌했고 술 냄새가 쿰쿰한 시가 냄새를 뚫고 풍겨왔다.
“작업실을, 안내해 주기로 하지 않았나! 하하, 늦어서 미안하군! 딸꾹, 자 어서 나오게, 얼른 가보자고. 마음에 들걸세. 자네의 영감을 자극할 만한 곳일 게야.”
잠옷 차림인 자비엘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를 잡아끌며 후작이 말했다. 담요를 서둘러 걸친 그는 시트리를 방에서 억지로 쫓아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후작을 뒤따랐다.
“작업실은 별채로 만들었다네. 아무래도 작업할 때 애로사항이 많지 않은가. 불쾌해하는 이들도 있어서 말이야. 자네도 시체 냄새가 나는 곳에선 자고 싶지 않겠지?”
킥킥거리며 웃는 후작은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넘어질 것 같아 부축해 주어야 하나, 하고 자비엘이 고민하는 사이 등불을 든 늙은 집사가 그를 붙잡았다.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자비엘을 보고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밤길이 어두우니 같이 모시겠습니다.”
피곤해 보이는 인상의 집사는 감정 없이 중얼거렸다.
본 저택 정원의 동쪽 끝에 있는 오솔길을 조금 걸으니 아담한 2층짜리 오두막이 보였다. 귀족의 별채라고 하기엔 작았으나, 작업실이라기엔 충분히 큰 크기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별채는 2층이 아니라 단지 층고가 높은 단층 건물이었다.
“그 어떤 거대한 것도 박제할 수 있도록 높게 지었다네.”
자비엘의 마음을 알았는지 후작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높은 천장은 아마 기린을 박제하고도 남을 거였다.
실내에 배인 은은한 썩은 냄새가 오랫동안 박제로 사용된 곳이라고 나타내고 있었다. 자비엘이 박제에 필요한 도구들을 챙겨왔으나, 이곳을 보니 쓸데없는 짐처럼 느껴졌다. 통으로 펼쳐진 실내엔 모든 것이 준비돼 있었다.
“마음에 드나? 더 원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집사에게 말하게. 바로 준비해 주지.”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박물관에서 일할 때보다 더 좋은 환경일지도. 자비엘은 다시 한번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하죠?”
“글쎄…. 어쩌면 내일 당장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예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
“네?”
후작이 턱을 긁적였다.
“집사가 설명해 주게나.”
“사냥은 공식적으로 내일부터지만…. 주인님이 잡은 모든 사냥감을 맡기진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에 드시는 것을 골라 박제하시는 거죠. 그래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작업물이 없어도 사례는 예정대로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리고 완성본이 후작님의 마음에 쏙 든다면 추가 의뢰를 부탁드릴 겁니다. 이건 사냥감과 별개의 박제인데, 이건 안내해 드린 것과 따로 보수를 드릴 셈입니다. 추가금인 겁니다.”
집사가 기계처럼 쉬지 않고 긴말을 내뱉었다. 마치 몇 번이고 반복한 대사 같았다.
“특별 의뢰란 정확히 무슨 말씀인가요?”
“그건 비넷 군 실력에 달려있다네. 조금 비밀스러운 의뢰라 말이야. 물론! 자네의 실력이 완벽하다는 건 오랫동안 지켜봐서 알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자네가 해온 것과는 다른 작품이 될지도 몰라서 말일세. 이해해 주길 바라네. 완성품을 보고 나서 준비가 되었다 싶으면 부탁함세.”
역시 귀찮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자비엘은 시트리를 통제하면서 동시에 책잡히지 않고 이 귀족의 의뢰를 끝마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인지 모를 깊은 시골 숲속에서 도망치거나 조난될 일이 생기는 건 사절이었다. 어쩌면 저 실력 테스트에서 일부러 실수하는 것도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비엘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자비엘이 방으로 돌아오니 시트리가 자비엘의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길다란 몸이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것만으로도 작은 방이 꽉 찬 것만 같았다. 시트리는 돌아왔네, 달링. 하고 야살스럽게 웃었다.
“흥분한 거 같은데?”
시트리는 자비엘의 어깨를 손으로 쓸었다. 자비엘은 그 손을 구태여 쳐내지 않았다.
“이제 자야 합니다. 녹티스.”
“꼭 끌어안고 자장자장 해줄까?”
“하아…. 인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죠.”
“방금 들은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게 될 거 같아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잖아. 그래서 우리 자비가 설레서 밤잠을 못 이루면 어떡해? 내가 도와줄게♡”
푹 잘 수 있도록 뇌라도 주물러 줄까?
“저는 어린아이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는 탈 없이 일을 마무리 짓고 나서, 더는 연관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멋대로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볼 때 자비는 변태에 '이상한 인간'이 맞는데 말이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그 ‘의뢰’라는 거 즐거운 일이 될 거 같아♡”
시트리가 큰 소리를 내며 진심으로 웃었다. 유쾌해하는 그 모습에 자비엘은 촛불을 후, 불어 꺼버렸다. 그의 반응을 보니 시트리는 후작의 '비밀 의뢰'가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그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곤 혼돈과 비상식적인 것뿐이니, 자비엘은 당연히 ‘비밀 의뢰’가 제대로 된 일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를 해도 바뀔 일이 아니다…. 고민하는 시간에 잠을 자는 게 낫겠지. 자비엘은 계산을 끝내고 시트리에게 말했다.
“이제 잘 겁니다. 진짜예요.”
“같이 자자♡”
방으로 돌아가세요, 녹티스. 방문이 닫혔다.
다음날, 사냥이 시작되고 저택을 가득 채웠던 손님들이 차례로 총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시끄러웠던 전날의 분위기와 다르게 조용한 적막이 저택 안을 기분 좋게 맴돌았다.
후작의 의뢰는 오늘 올지 내일 올지 알 수 없는 일인지라 자비엘은 괜히 기다리며 마음 졸이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할 일 없는 시간은 서재에서 책을 마음껏 읽으며 보냈다.
별장이라 그런 것인지, 손님에게도 자유롭게 허용된 서재는 나름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소유자의 취향을 드러내듯 책의 종류는 조금 편향적이었지만 말이다.
‘미노타우로스의 실존에 대한 고찰’
특이한 제목의 책을 읽으면서 자비엘은 이 서재의 구성이 마음에 든다는 점이 조금 불편했다. 맞은편에 앉아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시트리 때문이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인 것 같다고 했잖아♡”
책장 한쪽은 오컬트를 접목한 생물학책, 다른 한쪽은 희귀한 생물 도감들…. 자비엘은 그저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에요. 라고 답했지만, 시트리에겐 통하지 않고, 자비엘도 그걸 알았다.
자비엘이 첫 사체를 받은 건 이곳에 온 지 닷새가 지난 후였다. 박제의 주인공은 털 결이 고운 흰 족제비였다.
“최대한 상처를 잘 봉합해서 깨끗하게 전신을 박제해달라 하셨습니다요.”
족제비를 가져온 늙은 하인이 말했다. 오늘치 사냥을 나간 지 아직 두어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서재에 있던 자비엘을 급하게 찾아 와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총은 내장을 파괴하니까 주인 나리께선 화살을 고집하시지요. 보세요. 아직도 속이 탄탄하지 않습니까. 피가 빠진다고 촉도 제거하지 않으셨어요.”
대머리에 난 땀을 닦으며 자랑하듯 그가 덧붙였다. 자비엘은 어차피 내장은 다 비우니까 겉에 상처가 별로 남지 않는 총이 낫다…. 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라고 했을 뿐.
“녹티스, 아무리 조수 신분으로 왔다고 해서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필요 없습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문제없잖아요? 자비엘이 지척까지 다가와 자기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시트리에게 말했다.
“이제 곧 자기가, 이 작은 쥐를 만질 거잖아. 나는 자비가 박제하는 모습이 섹시해서 좋더라…♡”
“…헛소리하지 마시고, 방해되지 않게 조금 떨어져 있으세요.”
지금도 봐봐, 엄청 섹시해♡
박제에 사용될 가죽은 최소 48시간을 소금에 절여야 한다. 그 뒤 약품처리도 해야 하며, 내장은 깨끗이 제거한 뒤 썩지 않게 코팅한다. 모양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내장재도 넣는다.
그런고로 후작이 완성품을 받은 것은 족제비가 죽은 지 2주 가까이 됐을 무렵이었다. 후작이 제공한 검은 흑요석을 박은 흰 족제비의 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생명은 사라진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영원히 남아있겠지만.
박제를 본 후작은 침을 튀겨가며 감상을 토해냈다.
“너무 완벽하네!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최고군. 비넷 군 자네의 완벽한 솜씨로 나를 위해서 만들어줬다는 점이 제일 좋아. 본가로 가져가서 내 침대 옆에 장식해야겠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보고 싶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자네에게 부탁한 게, 그 사이에 몇 개 있었지? 전부 취소해도 될 것 같군!”
“네?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들 말씀이신가요?”
족제비를 잡은 뒤로 띄엄띄엄 보내온 순록과 여우 같은 것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건 별것 아닐세. 자네에겐 저번에 말한 큰일을 맡겨도 될 거 같구먼. 아 물론, 완성하고 싶으면 완성해 주게! 보수는 당연히 지급하지. 다만 내가 얼른 새 의뢰를 하고 싶을 뿐이야! 그걸 우선으로 해줬으면 해!”
자비엘은 잠자코 후작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내일 바로 가져오지! 기다리게나. 내가 미리 생각해 둔 게 있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어서 잡지 않고 키우던 것이 있지. 존!! 존, 어디 있나! 당장 채비하게!”
자비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후작은 집사를 찾으며 작업실을 뛰쳐나갔다. 가벼운 사람.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으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작업할 필요가 없다니…. 자비엘은 고개를 돌려 눈알이 빠진 순록의 텅 빈 곳을 바라보았다.
“내일…. 까지 인가….”
조금 밤을 새워서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비엘은 오늘 읽으려던 책을 포기했다.
아침 일찍부터 후작이 찾아왔다. 약속대로 내 바로 의뢰하러 왔다네! 싱글싱글. 금니가 반짝였다. 굳이 직접 찾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아침부터 그를 제일 처음 보게 된 자비엘은 그를 달고 작업실로 향했다.
그가 내민 것은 두 마리의 흑조였다.
“이 둘을 합쳐주게.”
“네?”
상처 난 날개 따위를 깨끗한 것으로 고쳐 달라는 건가? 자비엘은 새의 깃털을 꼼꼼히 살폈다. 어떻게 죽인 것인지 두 마리 모두 상처가 하나도 없이 멀쩡했다.
“내가 구상한 것은 두 개의 머리일세. 그 지옥의 파수견, 케르베로스 같은 습 말일세.”
“그 말은…. 원형을 훼손하게 됩니다.”
“바로 그거야!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네. 몇 번 기본은 가는 이들에게 부탁했었네만 영…. 결과가 아니었었어. 하지만 비넷 군! 부디 허락해 주게.”
후작은 두 손을 꼭 붙들며 부탁했다.
“이게 그 ‘비밀 의뢰’ 인가요?”
자비엘이 낮게 속삭이며 물었다. 후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아닐세. 이 정도는…. 이 정도는 뭐, 괜찮지 않은가? 조금 특이한 취미일 뿐이야. 특별한 생물에 관심이 많거든! 아무튼 부탁함세.”
“…알겠습니다. 맡겨주세요.”
자비엘은 두 마리의 깃털을 손질하고, 내장을 씻어내서 버리고…, 화학 약품을 꺼내 들며 생각했다. 긴 목은 유지하고 가슴에서부터 이어지도록 하자. 그리고….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해본 적 없는 종류의 작업이었으나 제법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지 구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작업중인 사체를 보며 자비엘이 잠시간 가만히 있자, 시트리가 그를 끌어안았다.
“자비가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거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를 말이야! 일종의 창조자가 되는 거야. 기분이 어때? 내가 볼 땐…, 좋아 보이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혀 끝에서 맴돌던 소리는 그대로 목구멍 안쪽으로 돌아갔다. 자비엘은 그저 자신을 옭아맨 시트리의 팔에, 손을 얹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행위를 하는 데도 작업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진척 속도가 빨랐다. 집중도 잘되고 멈춰 서는 순간이 없었다.
후작이 찾아오는 일만 빼고 말이다. 후작은 자비엘의 작업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족제비를 맡겼을 땐 관심도 없던 사람이 매일 찾아왔다. 그는 괜스레 찾아와 아무 말을 늘어놓고 가곤 했다.
오늘은 마음에 드는 사냥감이 없었다며 그가 원하는 자신의 사냥감에 대한 철학을 토해냈는데, 자비엘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넘겼다. 어느 순간 눈치채니 후작이 올 때는 시트리도 자리를 비우고 없을 정도였다.
“‘새로운 미가 있어야 해. 항상 보던 것은 시시하잖아. 자네의 작품을 보니 내 말을 이해할 거라고 믿었네. 지금도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감격스러워!”
자비엘이 후작의 말을 돼지 울음소리와 비슷하게 여기며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지금까지 혼자서 잘만 말하던 돌연 질문을 하나 던졌다.
“비넷 군은 신화 속 생물에 관심이 있나? 나는 좋아한다네. 케르베로스도 그래서 좋아하지. 백조는 개가 아니지만! 하하하.”
후작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고, 자비엘은 그의 질문에 빠르게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원래부터는 아니지만, 요 몇 년 사이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아름다움 같은 것들에요.”
“그런가? 그렇단 말이지? 정말 비넷 군이 좋다네.”
이죽이죽 후작이 웃으며 자비엘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 저녁 식사 후에 잠시 이야기 좀 하세나! ‘비밀 의뢰‘ 이야기 말이야. 후작이 쓸데없이 윙크하는 모습을 보고, 자비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빠르게 고갤 돌렸다.
후작은 약속대로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자비엘을 붙잡았다. 그동안은 여러 귀족과 모여서 바로 술판이나 도박을 즐기곤 했는데…. 오늘의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네.”
대사만 들으면 데이트 신청 같은걸? 동행한 시트리가 속삭였다. 후작이 오면 자리에 없던 주제에,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 시트리는 후작이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고 따라오는 게 틀림없었다. 자비엘은 조용히 하세요. 하고 시트리를 살짝 밀어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지하감옥이었다. 지하로 향하는 긴 계단 앞에서 등불을 든 집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는 미리 언질 받은 것인지 둘이 가까이 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육중한 문에 열쇠를 넣어 돌렸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축축한 공기가 기분 나쁘게 뺨을 스쳤다. 곰팡내와 어디선가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끊임없이 났다.
“이런 곳으로 데려와서 미안하네만 보여주고 싶은 이가 여기 있어서….”
후작이 머리를 긁적였다. 계단을 내려와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끝에 작은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 자일세.”
곰팡이가 핀 지하감옥의 모습과는 이질적이게도 사내가 있는 창살 안쪽은…. 감옥치고는 좋은 환경이었다.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두꺼운 도포. 바닥에 놓인 쟁반 위에는 흰 빵과 죄인에게는 구경도 못 해볼 만한 삶은 계란, 닭고기 등이 남아있었다.
“이 자가 누구이길 그렇죠?”
“이번 의뢰의 재료일세.”
자비엘이 놀라 후작을 바라봤지만,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진심인가요?”
“물론이지!”
“이 남자의 이름은 사무엘. 뭐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일세. 어쨌든 나에게 10만 파운드의 빚을 졌지. 몇 번씩 자비를 베풀어도 갚지 못해서 내 노예가 됐네. 그런데도 반항기가 심해서, 다른 하인들을 폭행하거나…. 여자들을 건드렸다네. 우리 하녀들이 더러 일을 그만두었지. 이것 말고도 나열하자면 입 아플정도로 수많은 죄를 지은 사형수라네. 존, 비넷 군에게 몸을 보여주게나.”
집사가 철장 안으로 들어가 남자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는 도망칠 기회임에도 무력하게 그 손길에 따랐다. 그리고 집사가 그의 허름한 옷을 들어 올리자 꽤 그럴듯한 복근이 드러났다.
“그의 처분을 고민해 봤다네…. 뭐 즉결 처분할 셈이었네만. 나무꾼 출신이랬나? 그래서 몸이 좋은 편이지 뭔가. 그래서 그 뒤로 엄청나게 공을 들여 몸을 키우게 했네. 죄수 주제에 좋은 것만 받아먹고, 제대로 된 선생을 붙여서 운동시켰지. 이 정도면 그리스의 조각상에 버금갈 것 같지 않나?”
자비엘은 후작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 자로 미노타우로스를 만들면 재밌을 것 같네!”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자비엘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죽을 죄수일세! 가족도 없어 책임질 사람도 없지. 뭐…. 억지로 아이를 밴 하녀가 있지만. 만약 그대가 수락한다면 그 불쌍한 하녀와 아이에겐 빚을 물려주지 않을 걸세.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1만 파운드를 주겠네. 억지로 일을 그만두고, 추천장도 받지 못할 불쌍한 여인에겐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겠나? 죄 없이 태어날 아이에게도 말이야.”
나는 어릴 때 그리스에 갔었을 때, 그 수많은 조각상을 보고 생각했네. 좀 더 현실미가 있다면 아름다웠을 텐데. 그래서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크레타의 황소. 몸은 인간이며 머리와 꼬리는 황소인 괴물…. 추악한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겠나? 황소도 내가 엄청난 아이로 준비했지! 뿔이 무척 아름다운 아이일세. 어떤가? 이게 내 ’비밀 의뢰‘라네. 부디 자네가 받아줬으면 좋겠어.”
“저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수랑도 상의를 해봐야 하고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니까요.”
자비엘은 시트리를 힐끔 보며 그의 핑계를 댔다. 시트리는 그에게 맞장구쳐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정말이었다.
“물론 거절해도 되네. 난 자네 같은 뛰어난 예술가를 해칠 생각은 없어. 자네가 이런 일을 밖에다 말할 자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설령 자네가 입을 놀린다고 해도 몇 번이나 그 혀를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려야지. 좋은 결과를 기다리겠네. 내일 저녁 후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후작이 자비엘의 어깨를 툭툭 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자네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을 또 만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거절당하면 내 인내심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구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은 분명한 협박이었다. 그의 손에 죽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협박당하는 건 평범하게 이 일을 해결하기엔 번거로운 걸림돌이었다.
자비엘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죄수를 보았다. 어떻게 되고 싶나요? 그는 묻지 않았다. 죄수의 의견은 여기서 아무런 반향도 일으킬 수 없으니까…. 텅 빈 그의 눈은, 모든 걸 체념한 채였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살려달라고 빌지 않았다.
“돌아가죠. 녹티스.”
“녹티스, 어디 가요? 이리 오세요.”
일부러 자기 방에 들어가는 시늉을 하는 시트리에게 자비엘이 말했다. 그러자 시트리는 응♡ 하며 따라왔다.
“정말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자비? 왜 그런 고민을 해♡ 사람까지 합법적으로 제공한다는데.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올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사람을 가르는 일이라고? 진짜 인간의 내장을 만지는 거야♡ 나는 자기가 내 배를 가를 때 정말 좋던데…. 오싹오싹해져♡ 날 내려다보는 흥분에 붉어진 자기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앙-♡ 시트리가 몸을 비비 꼬는 척을 했다. 그런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자비엘은 자리에 앉아 팔짱을 꼈다.
후작은…. 객관적으로도 높은 사람이다. 그가 이번 ’의뢰‘를 이야기를 당당히 꺼낸 것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당하기 때문이겠지. 자비엘이 이 일을 발설해도, 그의 말처럼 죽진 않겠지만…. 소문이 퍼지지도 않을 것이다. 후작이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그리고 어떤 불법을 저질러도 웬만해선 처벌받지 않겠지. 높으신 귀족이란 으레 그런 법이다.
그런고로, ’의뢰‘ 또한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것이다. 만약 누가 완성품을 보고 의문을 품어도 그저 진짜와 매우 흡사한 조각상 정도로 이야기가 끝나겠지.
“아직도 고민이야? 달링? 달링, 생각처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즐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어차피 처벌될 죄수니까요?”
시트리가 자비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방긋 웃었다.
“응♡”
미노타우로스. 보존을 생각하면, 후작이 정성스럽게 키운 그의 근육은 옅어질 것이다. 특히 복근은 옅은 살가죽을 보존해야 하니까. 하지만 만약 후작이 허락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근육을 보존하는 형태로 만든다면…. 사체에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고 장기만 도려낸다…. 가슴의 유륜은 동물 가죽으로 변경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흉곽을 유지할 수 있겠지.
“어머♡ 즐거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
시트리가 까르륵 웃었다.
날이 밝자마자 자비엘은 집사에게 의뢰를 수락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후작이 잠옷 차림으로 찾아와 그를 끌어안으며 감사의 말을 토해냈다.
“정말 기대함세!”
그 말과 함께 사무엘은 죽었다. 이름도 기억되지 못할 죄수 말이다. 커다란 천에 돌돌 말려 이송된 그는 목이 잘려 죽었을까? 목이 없었다. 시신을 훼손한 채로 보내주면 어떡합니까?
하인에게 한 소리 했지만, 그들은 죄송합니다…. 라고 하고 급하게 소의 머리를 놓고 도망갈 뿐이었다.
황소는 후작이 자신한 것처럼 웅장한 뿔이 달려있었다. 불쌍한 눈꼬리에 맺힌 눈물과 함께였다.
자비엘은, 자비엘은…. 남자의 시신을 매만졌다. 심장이 멈췄는데도 아직까지 체온이 느껴졌다. 손이 살짝 떨렸다. 긴장? 혹은 흥분? 시트리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부럽네♡ 나도 자기 아래에 누워서 배가 갈리고 싶어♡”
“악취미 같은 발언은 삼가세요.”
제일 악취미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시트리가 생각하며 자비엘의 정수리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장기를 제거하고…. 마지막으로는 목을 이을 거예요. 자국이 남지 않으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할 테죠. 그러니까.
“끝날 때까지 기다리세요. 녹티스.”
“아♡ 정말? 기다리고 있을게♡”
fin.
202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