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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질량
2024. 10. 2. 21:14w. 관측자 (@0peraBlue)
이맘때쯤의 날씨가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어김없이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혀 흘러내렸다. 와이퍼가 앞 유리를 좌우로 두어 번 미끄러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비 때문에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앞 차량의 뿌연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자비엘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안타깝게도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자비엘은 퇴근 전에 사무실에서 피웠던 것이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비엘은 차창에 한쪽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초조하게 핸들을 두들겼다.
정체가 쉬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비엘은 샛길로 빠지는 것을 택했다. 조금 더 돌아가야 했지만 비 오는 퇴근길의 차량 정체가 풀리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다는 집에 더 빨리 도착할 터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협주곡의 바이올린이 템포를 높임과 동시에 자동차의 속력도 빨라졌다. 빗줄기가 스타카토처럼 차창을 두드리고 지나가다가 집 근처에 가까워지자 잦아들었다.
차고에 주차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습기 어린 저녁 공기가 폐부로 훅 끼쳐 들어왔다. 집 주변에도 제법 비가 내렸는지 물웅덩이가 여러 군데 생겨 있었다. 구두와 겉옷이 젖지 않도록 자비엘은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을 피해 현관으로 들어섰다. 문고리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달칵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저 왔습니다."
무심코 말을 내뱉고는 아차 싶어 자비엘은 고개를 들었다. 불 꺼진 집 안에는 밖과 같은 습하고 서늘한 공기만이 가득했을 뿐, 여느 때처럼 그를 마중해 주는 이는 없었다. 이런 날씨면 녹티스가 집안의 불을 환히 켜놓고 벽난로에 장작을 때어두어 퇴근하고 나면 집안에 훈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녹티스가 백 년간 미뤄둔 일을 해결하고 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녹티스는 한시라도 자비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투정 부렸지만, 겨우 사나흘 정도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백 년간 미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비엘이 그의 등을 떠밀어 보내버렸다. 그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도 아니고, 성인이라고 인정받은 지도 한참이 지난 자신이 고작 며칠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할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녹티스는 가족도 아니고 반려동물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거두게 된 귀찮은 악마라는 존재일 뿐이지……. 젖은 겉옷을 현관 옆에 세워둔 옷걸이에 걸어둔 자비엘은 거실로 향했다. 스위치를 켜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오늘따라 굉장히 집이 넓게 느껴졌다. 원래 넷이 살다가 혼자 남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생각한 자비엘은 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지워버렸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자비엘은 또다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느낌. 애써 허전함을 밀어내며 홀로 저녁을 먹고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누운 자비엘은 결국 인정하고 말았다. 녹티스의 존재가 이 집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넓은 거실을 홀로 가득 채우는 장대한 체격은 물론이거니와 이 거대한 2층 저택에 그의 영역이 아닌 곳은 없었다. 자비엘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한 이후로 녹티스는 집 안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겼다. 이제 그의 집을 가장 많이 구성하고 있는 것은 녹티스였다. 자비엘은 눈을 감고 언젠가 초대받아 갔었던 고위 귀족의 저택의 가장 넓은 방에서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랜드 피아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을 자리에서 치운다면 분명 허전함이 느껴질 터였다. 피아노의 밑에 있던 카펫 부분만 유독 깨끗하다든지 다리 부분의 마루만 푹 패여 있다든지……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을 것이다. 그런 감각이었다. 가족이나 반려동물의 부재만큼 깊지는 않지만 녹티스의 부재는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녹티스와 함께한 시간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꼭 아주 오래전부터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존재는 어느새 자비엘의 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달갑지 않은 기분이 들어 자비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선반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담긴 궐련갑과 라이터가 딸려 나왔다. 안에는 다행히 담배 몇 개비가 들어 있었다. 자비엘은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밤공기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담뱃불이 꺼질 때까지 자비엘은 녹티스를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적응의 동물 아닌가. 한편으로는 녹티스가 제발 곁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대로 영영 사라진다면 오히려 반가워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녹티스의 존재가 그의 삶에서 차지하는 무게를 가늠하다 보니 밤은 깊어갔다.
그리고 녹티스가 자리를 비운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차에서 내리며 자비엘은 점점 녹티스의 부재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녹티스가 돌아왔길 바라는 마음 반, 아니길 바라는 마음 반으로 자비엘은 현관문을 열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자비엘의 시야에 익숙한 구두코가 보였다. 자비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색이 다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자비엘은 숨 막히도록 끌어안겼다.
"달링~~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윽……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얌전하게 인사나 주고받으려고 했던 자비엘의 생각은 호흡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녹티스는 자비엘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이마에 마구 볼을 부볐다.
"하지만 3일이나 자기를 못 봤단 말이야……♡"
"불멸을 사는 악마 주제에 사흘이 무슨 대수라고……."
"그렇지만 인간의 수명은 짧잖아? 자비를 볼 수 있는 시간이 3일이나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단 말이지?"
"하아……옷이나 갈아입게 비켜주시죠."
녹티스의 가슴에 마구잡이로 비벼진 나머지 자비엘의 머리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귀찮다는 얼굴로 복도에 달린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하는 자비엘을 미소 지은 채 바라보던 녹티스가 물었다.
"자비, 자기는 나 보고 싶지는 않았어?"
"당신 같은 사람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싸늘하게 쏘아붙인 자비엘은 멈칫했다. 녹티스가 집을 비운 동안 느꼈던 허전함이 떠올라서였다. 그것도 혹시……일종의 그리움이었을까? 자비엘은 가늘게 눈을 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런 감정이 그리움일 리 없다. 더군다나 자신이 녹티스를 그리워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아잉, 매정하기는……♡ 물론 그런 점이 매력 포인트긴 하지만 말이야♡"
"후우……며칠간 조용해서 좋았는데 다시 온종일 당신의 수다를 받아 줄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군요."
고개를 저으며 자비엘은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뭐어? 그동안 나는 자비가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는데, 너무하잖아♡ 그런 그의 뒤로 녹티스가 볼멘소리를 하며 빠르게 따라붙었다.
2024.10.02